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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딜레마


BY 왕눈이 2007-07-06

  처음엔 긴가민가 했었다. 하기는 강산이 두번 변했는데 잠시동안 못알아본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긴 했는데...순간 \'아\'하는 탄성과 함께 그와 눈이 마주치면서..

\'준구씨\'

\'미영아\'

동시에 이름이 터져나왔다. 살이 조금 더 찌고 중후한 맛이 나긴 했지만 20년전 나를 설레게

했던 그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련함도 잠시...앞치마를 두르고 뒤지게를 쥐고 있는 내모습을 생각하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싶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허둥거리고 있었다.

 

\"오랫만이네..어떻게 여기서...\"

\"네...저 여기서 일해요..좀 놀라셨죠?..이런 모습..\"

\"아니 그런뜻이 아니라 서울에서 사는줄 알았는데...\"

 

 맞아 이런 내모습에 준구씨도 당황하고 있구나...미영은 잠시 더떤 대답을 해야할 지 망설였다.

 

\"여기 내려온지 1년 쯤 돼요. 남편이 이속으로 발령이 나서...\"

\"아! 그랬구나..아 미안..말투가 이러면 안되는데...\"

\"아니에요, 편하게 하세요.\"

 

 하지만 궁금하다는듯 귀를 쫑긋 세우고 바라다 보는 시선들을 느끼고 미영은 황급히 다음말을 이었다.

 

\"저...지금 제가 근무중이라..20분 후면 근무가 끝나는데..조금 기다려 주실래요?\"

\"어, 그래..그럼 그러지 뭐..나도 쇼핑좀 더 하고...그럼 끝나고 차라도 한잔 하지 뭐..\"

 

어떻게 20분을 채웠는지 그 다음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앞치마를 벗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아! 거기엔 너무나 생뚱맞은 중년의 여인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모습으로 만나다니...얼마나 실망했을까..

눈물이 핑돌았다. 정말 이런 모습으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여리고 고왔던 모습만을 기억했던 그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미영은 도저히 그 모습으로 준구를 만날 수 없었다.

 서둘러 혹시 그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직원용 계단을 내려와 그동안 아끼느라 거의 타본적이 없었던 택시를 불러 세워 그냥 집으로 돌아 오고야 말았다.

 남편의 실직으로 더 이상 서울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워 시댁인 이곳으로 내려온지가 1년이 되었고 조금씩 농사일을 배우는 남편에게서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마침 이 소도시에 대형마트가 들어왔고 조금 망설였지만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어볼 양으로 뒤지게로 만두를 열심히 뒤집으며

\'오늘 하나 플러스 하나 행사입니다.\'를 외쳐온지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준구씨가 왜 이곳에 왔는지 미용도 의아한 일이었다. 분명 그도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꽤 괜찮은 집안 여자와 결혼해서 잘산다고 했는데..

 다음날부터 미영은 다시 준구와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 뒤지게를 잡는 시간보다 두리번 거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매니저에게 불려가 한소리 듣고야 말았다.

 한달이 더 지났지만 준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다니러 온 모양이었어...다행이다.\'

 미영은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다시 열심히 뒤지게를 놀리면서

\'만두 하나 플러스 하나 행사합니다.\'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준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분명 준구인 것 같은데..

 언뜻 언뜻 먼자락에서 힐끔거리며 미영의 모습을 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었다.

 미영은 가슴이 콩당거리고 머리가 웅웅거려서 제대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지만 준구가

분명했다.

\'여기에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내모습이 부끄러워서 아는 척 하기가 싫을꺼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미영은 죽고 싶도록 지금의 현실이 싫었다.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두르고 있던 앞치마가 갑자기 미영을 옭아메고 있는 올무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트의 일자리를 포기할수 없다는 그런 현실이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괜찮아....이건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야..\'

 

미영은 3-4일에 한번정도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준구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 사랑하는 두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어제 준구가 미영에게로 머뭇거리며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 미영아..내일 일끝나고 차한잔 하자..\"

미영은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대답했었다.

\"그래요, 내일 일끝나면 9시인데 괜찮겠어요?\"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미영은 머리가 아득해져서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아침에 정성껏 화장도 하고 안하던 드라이도 제법 솜씨를 부려서 하고 나선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트 건너편 \'애수\'라는 간판이 보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창가에 말쑥한 차림으로 앉아있는 준구의 모습을 보자 미영은 눈이 시리고 귀가 멍해져서

앉으라는 준구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 그날 기다렸는데 안와서 걱정하다가..그냥 갔었어..무슨일 있었니?\"

\"네, 갑자기 집에 일이 좀 생겨서..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전화번호도 모르고 해서..\"

\"그랬구나.\"

준구 역시 목이 타는지 놓여진 물잔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두달전 발령을 이곳으로 받았어..혹시 아는지 모르겠다..얼마전에 저 시내 사거리에 미래투자라고..지점이 하나 생겼지..\"

\"아, 본거 같아요. 그럼 거기서 근무하시나 봐요.\"

\"그래 마침 내가 다른일을 해볼까 하고 일을 쉬고 있었거든..그래서 일단 같이 내려오긴 했는데..\"

\"그럼 지금 쉬고 계신거에요?\"

\"그래...집사람이 지점장이 되면서 내려온거라..의욕이 대단해..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오니까...\"

\"그럼 집안일은?\"

\"사실 집사람이 더 바쁜편이라서 내가 살림을 좀 거들어 주고 있어.\"

\"네..그러셔야죠.\"

\"근데 미영이를 만나고는 나도 영 어색해서 마트에 갈수가 있어야지..서로 마주치면 좀 그렇고...\"

\"요즘엔 남자들이 다 시장보고 그래요..뭐 어때요..저도 심심해서 아르바이트 좀 하는건데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미영은 정말 심심한 여자처럼 보였으면 싶었다.

\"근데 이 늦은 시간에 장을 보세요? 저랑  마주치는거 좀 그러시면 낮에 오시면 되는데..전 3시부터 9시까지만 근무하거든요...\"

 예전에 준구씨는 참 자상했었지...바쁜 아내를 위해 손수 장도 봐주고...아무리봐도 멋진 남자야..

미영은 무뚝뚝한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희미한 아쉬움으로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 저..그게..8시가 넘으면 세일을 시작하잖아...그래서 일부러 8시 넘어서 나와..불과 몇분사이에 50%까지 세일을 하는데 조금 늦게 나와서 사는게..훨씬 낫지..\"

\"아...네..\"

\'사실 집사람이 금융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보니까...얼마나 계산속이 뻔한지..한달에 주는돈이 정해져 있거든...이렇게 하면 한달에 제법 돈이 좀 모아진다니까....근데 미영이가 일하는 곳을 지나야 하는데..영 어색해서 ..한달쯤 저녁에 못나왔더니..도저히 안되겠는거야..가계부를 이리보고 저리봐도 도저히 빼낼곳이 없더라구..\"

갑자기..준구씨의 얼굴과 목소리가....뒤로 멀어져가는것 같았다.

\"뭐 남자가 집에서 살림하는거..요즘엔 많다고 하더라...너도 다 이해하지?\"

순간 미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뒤지게를 열심히 놀리고 있는 준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계부를 적으면서 세일로 몇푼 더 모았다고 즐거워할 준구의 모습이..

미영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렇게 얘기했다..

\"준구씨 마음놓고 오세요..혹시 한정판매 이런거 하면 제가 미리 맡아놔 드릴께요..옛날친구 좋다는게 뭐에요..호호.\"

노란 전등불이 준구의 환해지는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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