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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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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에서 띄운 편지(사과나무 도서관에서...)


BY 개망초꽃 2007-05-23

상아야? 안녕? 꽃잎 붙인 편지 잘 받았단다.

여기도 모두모두 안녕이란다. 


엄마는 오늘, 새로 산 은색 샌들을 신고 출근을 했어.

재작년에 신던 분홍색 샌들은 꽃순이 이빨로 발뒤꿈치를 홀라당 벗겨버렸잖아.

그래서 새로 샌들을 장만했거든.

연한 밤색이 있었는데 그걸 살 걸 그랬나봐

은색이 빛을 반사하니 갈치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샌들이 헐렁거려, 사이즈가 큰 게 아니고 내 발에 살이 없어서 그런가봐.

아니면 발등에 조여 주는 끈이 있어야 하는데,

갈치 샌들은 옆귀퉁이에 달려 있어서 살 없는 나의 발을 조여 주지 못하는 것 같애.


남의 신발 같은 신발을 신고 아파트 뒷문을 나서자마자

꽃향기가 아침잠이 많아 덜 깨운 나의 머리를 달뜨게 만드는 거야

어디서 나는 건가? 둘러보니 찔레꽃이 나무 가득 빈틈없이 피어있는 거 있지.

찔레꽃이 피면 여름이 오고 있다는 신호탄이거든.

올 봄은 처녀들 치마처럼 짧았어.

아슬아슬하게 봄이 오는가 싶더니 한 낮에 기온이 초여름과 똑같아졌단다.

그 좋던 계절은 한 달이었어.

한 달이란 시간은 그 사람을 알기에 너무 부족한 시간이거든.

낯선 타인을 만나, 연락하고 전화하고 그런 시간밖에 되지 않은 얄팍한 시간인데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나 석 달은 되어야 감정이 생기고,

계속 만남을 지속시켜야는지 말아야하는지 결정을 하게 되는데

한 달 만 엔 결정을 못하겠더라고.

난 결정을 못하고 떠듬거리고 있는데, 봄은 한 달 만에 결정을 내리라는 거야.

봄은 너무 성질이 급해, 고약해, 이기적이야, 자기만 생각하는 못된 성미를 가지고 있어.

그래서 고민 끝에 봄을 보내기로 했단다.

모든 세상 이치가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고,

다시 온 나의 인연 여름에게서 순결한 빛을 띤 찔레꽃을 얻었어.

이 여름이 얼마큼 진지하게 내 곁에 있어 줄지는 더 사겨봐야 알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건 상대방의 순정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순백의 순결함이었어.


요즘 며칠동안 아침밥을 안 먹고 출근을 했어.

집에서 옥수수 카스테라를 싸가지고 와서는

도서관 청소를 끝내고 컴퓨터에 앉아 풀꽃 사이트를 클릭하며

커피와 함께 야금야금 먹고 있어.

야금야금 하니까 고양이 생각이 난다.

쌀쌀맞다가도 자기 마음 내키면 사람 몸에 자기 몸을 비비적거리는 고양이.

먹을 때는 더 해. 아주 얌전히 얍실얍실하게 먹거든, 예쁜척하면서 말이야.

근데 그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을 땐 섬뜩해.

머리부터 와그작와그작 과자 씹어 먹듯 맛있게 먹어서 옆에 사람도 먹고 싶게 만들거든.

빵 맛 떨어지게 그런 말을 왜하냐고 하겠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거야.

먹고 먹히고, 잡아채고 잡아 던지고,

어제는 분명 나만 팔자가 드새다고 한숨으로 밤을 뒤척이다가도

오늘은 행복하다고 눈물을 그렁거릴 때가 있다는 거야.


상록인 오늘 운동회가 있데, 줄넘기를 잘 해서 반대표로 나간다더라.

훌라후프도 날렵하게 잘 돌리더니 줄넘기도 날쌔가 잘 넘나보더라.

너는 운동하면 잼뱅이더니 네 동생은 너랑 재주가 전혀 다르네.

체육대학을 보내야할까……. 자기가 좋아하면 두더지 같은 농사면 어떻고,

웃어 줘야하는 장사면 어떻고, 손바닥에 구린내 나는 운전이면 어떻고

들고뛰는 운동이면 어떠리…….그렇지? 상아야?

나도 네가 뭐든 하고 싶은 거 했음 하거든.

그게 문학이든, 번역이든, 통역이든, 자그만 사무실 직원이든…….

그 속에서 열심히 하면 먹고사는데 무슨 지장이 있겠니.

엄마가 이만큼의 나이에 서 있으니 모든 것이 한 때이고,

아귀다툼 속에서 남은 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어.

난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상록이가 어떤 시시한 대학 어떤 과를 선택하든

엄마는 너를 묵묵히 지켜보듯 지켜볼 거야.


아침에 상록이를 보내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있잖아? 내 참, 기가 막혀서…….방바닥에 줄넘기가 그대로 있는 거야.

전화를 걸었더니, 그러게 말이예요, 하더라. 코도 귀도 다 막힐 일이지?

아니, 반대표로 줄넘기 시범을 한다는 애가 줄넘기를 안가지고 갔으니…….

글쎄, 어젯밤에 혼자 밖에 나가서 연습까지 했던 애가…….기가 막혀서…….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전화기에 대고 이그, 이그, 이러고 말았단다.

그래도, 지켜볼 수 밖에 어쩌겠니...


도서관 일은 고독하다고 해야 할까? 편하다고 해야 할까?

책장에 둘려 쌓여 하루를 보내고 있지.

책들이 엄마의 일거리를 제공하고, 엄마의 고독을 조금 씻어주기는 하는데

그들에게 쌓여 홀로 앉아 있으면 빌딩 숲 아래 핀 씀바귀 같달까?

아님 찻길 가운데 만들어진 화단 같달까…….

사람이 오고가고, 어디선가 사람 소리는 들리는데

나는 어울릴 수 없는 책상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이 책상을 필요로 하면서 자기네들 대화엔 끼워 줄 수 없잖아.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남들에겐 별로 눈길도 주지 않는 소외된 물건처럼 말이야.

뭐 그렇다고 힘들다거나 외롭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진 않아.

왜냐면 시멘트 사이에 핀 씀바귀 꽃은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거잖아.

금방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줄기에 노랗게 꽃이 피면 얼마나 예쁜지 아니?

나는 그 노란 아가씨에게 눈길을 여러 번 주거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거든.

찻길 가운데에 화단이 없었다면 교통사고도 더 많이 날 것이고,

얼마나 삭막하겠니? 그렇지?

엄마는 이 곳 사과나무 도서관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란다.

내가 없으면 사무실 직원들이 총총 걸음으로 달려 와서 책을 받고,

책을 대여하고 종종 걸음으로 제자리로 가야하니까

얼마나 번거롭고 하던 일에 지장을 주겠니? 그렇지 않니?


벌써 점심시간이네.

너는 도시락을 싸 간다고 했지?

엄마는 식당에서  이천 원짜리 식권을 사서  먹는데, 그런대로 괜찮아.

어젠 양배추 쌈과 마늘쫑마른새우 볶음과 김치찌개가 나왔어.

요즘 엄마는 \'밥 두 숟갈 더 먹기\' 한단다.

너는 \'빵 한 개 덜 먹기\' 하면 훨씬 살이 빠질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않거든

엄마는 닭발 같은 손가락과 가슴이 담벼락이라서 불만이거든.

이제 그만 떠들고 밥 먹으러 가야겠다.

너도 즐거운 점심시간 보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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