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항으로 가는 길엔 초봄의 싸늘함이 차창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별 말이 나누지 않았다.
일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던 얘들 아빠가 딸아이가 유학을 간다고 하니까 공항까지 데려다 준다고 연락이 왔다.
분명 기쁘고 축하해 줘야할 일이었고,
제주도로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방 학교 기숙사로 보내는 일도 아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일이 것만 서로 밀린 이야기도 다가올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바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각자의 잣대로 느꼈을 것이고
제각각의 상황에서의 작고 큰 걱정과 내일에 대한 설렘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딸아이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오고 전화벨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있었다.
딸아이는 인천공항에 온 적이 있냐고 내게 물었고
자긴 고등학교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갈 때 비행기를 처음 타 봤고
이번이 두 번째 비행인데 별일 없이 잘 탈 수 있겠지, 하는 말들을 했다.
엄마는 미국 친구가 왔을 때 와 봤고…….
딸아이가 유학을 가기 위해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며 영광이다, 라고 농담을 했다.
얘들 아빠는 주차장으로 가고, 딸아이와 나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바퀴달린 여행 가방은 딸아이가 끌고 나는 작은 가방 두 개를 들고
딸아이 옆으로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만나는 장소가 D 야, 엄마.
디?
눈이 나쁜 나는 알파벳 대문자 D를 찾아본다고 눈조리개를 줄였다가 늘렸다가 했다.
D가 가까워지니까 같이 유학 떠나는 친구들이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손 인사를 하고 달려와 끌어안기도 한다.
나는 속으로 외국사람 같은 행동을 취하는군. 했다. 아! 그렇지, 여긴 국제공항이지…….
실내 안인데 선글라스를 끼고 폼 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글라스 낀 사람들이 많네, 나도 낄 걸 그랬나. 멋져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네.
하하하…….
딸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엄마의 단순한 유모에 크게 웃어준다.
대학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던 친구도,
일본에서 한 방을 쓰게 될 친구 부모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다들 몸짓이 발랄하고 얼굴 바깥엔 구김이 없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만 가는 유학에다가
학비도 여기보다 저렴하고 기숙사도 제공되고,
이년동안 일본에서 일본말로만 수업을 듣고,
일본 문학과 일본 생활과 일본공기와 일본 흙을 밟고,
일본 하늘아래 일본 땅에서 피는 꽃과 식물을 보며
일본 언어와 비슷해지도록 노력할 아이들…….
다들 대견하고 다들 예뻐 보였고, 다들 미래가 보장된 듯 똘망똘망 해 보였다.
“빨간 코트 입은 애가 우리 과 일등이야”
“그러니?”
“쟤는 우리 과에서 제일 예뻐,”
“예쁘긴 한데 인상이 차갑고 날카로워 보인다.”
“아니야, 인상과는 달리 착 해. 일등 하는 애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아이와 같이 유학 가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보아서는 우리 딸아이가 동글동글 인상이 좋고,
일등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어려운 환경 속에
열심히 노력 했다는 것에 일등을 주고 싶었다.
그 해 여름은 비오는 날이 훨씬 많았다.
이른 코스모스가 길가로 피어나기 시작한 늦여름,
가정이라는 소중한 버팀목은 썩어 대책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구치소에서 나온 얘들 아빠는 빚에 견디질 못 해 도망치듯 빠르게 이혼수속을 밟아야 했다.
집은 은행으로 사채 빚으로 차바퀴에 깔린 흙탕물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는 아이 둘과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해버릴 수 밖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 때가 딸아이는 사춘기가 막 들어선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딸아이는 자기 물건을 챙길 때도
할머니네 좁고 낡은 아파트 방 한 칸에 셋이서 살아야 한다는 걸 알 때도
입을 꿰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이혼을 하고 아빠는 어떻게 되고 우린 뭘 먹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았고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생활 속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딸아이는 실밥을 풀고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할머니와 살기 싫다고만 했다.
공부를 왜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공부 잘 해서 뭐하는데? 엄마도 이렇게 살잖아? 했고,
할머니의 잔소리 때문에 집에 들어오기 싫다고 했다.
그러면 친정엄마는 내가 너를 위해 밥해주고 빨래 해주고 했는데 섭섭하다고 하고
나는 엄마와 딸 사이에서 이편도 저편도 어느 편도 되지 못 해,
내가 입을 스스로 꿰매야했다.
친정엄마도 편하게 사시다가 딸은 이혼을 해 손자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왔으니
동네사람 보기도 창피하고 속상해서 그 해 여름처럼 흐리고 비오는 날이 더 많았다.
딸아이는 파랑색을 좋아해 파랑색으로 새로 도배한 자기 방을 갖고 있다가
남동생과 엄마와 셋이서 한 방을 써야하니 그 불편함도 불편함이지만
가정의 몰락과 할머니의 잔소리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아주 깔끔하시고,
예민하셔서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 잔소리가 좋은 뜻이었는데도 사춘기였던 딸아이는 견디기 힘든 일상이었다.
집에 와선 편하게 쉬고 싶은데 할머니는 쫒아 다니며 잔소리를 한다고 하니…….
딸아이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독립한다는 말을 2학년 내내 내 귀에 쌓이도록 해댔었다.
그렇게 친정엄마와 딸아이는 서로 자기 입장에서 언성을 높이다가
딸아이는 펑펑 울기도 하는 사이 3학년이 되었다.
나는 고 삼 엄마 같지도 않았다.
학원도 보내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삼을 수가 없었고,
장사하느라고 밤늦게 들어왔고 피곤함에 쓰러져 말도 하기 싫어
입을 봉한채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시간이 빨리빨리 흐르고 흘러 무사히 고등학교만 졸업하길 바랐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달라져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휴일이면 아침부터 도서관으로 향하고
영어가 부족하다고 단과 학원을 보내 달라고 했고,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문제지를 신청해 달라고 했다.
당연히 성적은 올라갔고, 할머니에 대한 불만은 내려갔다.
흩어진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서 딸아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품게 했고
드디어 딸아이는 수능시험도 보기 전에
지방이지만 국어와 일본어 성적이 일등급이라서 수시로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학비 보조와 기숙사는 공짜였다.
기숙사엔 세탁기도 에어컨도 있고 일본 밥통도 있다고 딸아이는 좋아했다.
“공부 잘 해서 가는 거라고 엄마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녀도 돼,
엄마도 이제 기운내고 용기를 잃지 말고…….”
내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친구들도 안 만나는 이유는 자랑할 게 없어서라고 했었다.
딸아이가 그 말이 가슴 한쪽에 돌처럼 얹혀져 있었나보다.
공항에서 친구들 엄마들을 보더니 내 앞에 바짝 앉아서는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쁘고 멋쟁이야, 엄마가 원하는 꿈을 잃지 마세요.” 한다.
사실이 아니더라고 기분 좋아지는 한 마디.
딸아이는 어느덧 엄마의 마음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빠는 제발 좀 잘 사세요. 그렇게 살지 말고...”
딸아이는 어느 순간에 왜 헤어지고 무엇이 잘 못 되어 살아 왔는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