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막둥이 하나만을 데리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두딸과 함께 가장의 부재를 느끼면서 조금은 허전하여 쓸쓸하기도 하였지만
간만에 맛보는 자유로 쾌재를 불렀다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졌치고
울라 울라.
뜨거운물 솩 ~ 틀어 샤워하고
오오 !
\"코고는 소리 안들려서 좋겠군.\"
\"술냄새 안나서 좋겠군.\"
두딸도 쾌재를 불렀다.
\"엄마 우리 같이 자장.\"
\"오우 케이.\"
이내 침실로 들어가서......
이런 이런~
두 딸 아이가 토닥 토닥 다투고 있었다.
이유인즉 서로 엄마 옆에서 자겠다는 것이었다.
하이고 !
덩치나 작아야지 말만해가지고는......
딸둘이 서로 아빠 자리에 눕겠다고 싸우고 토라지고.......
도무지 타협이 안 되었다.
우리방은 마침 침대 하나가 또 있다.
그래서 딸둘을 아빠 엄마 침대에서 자라하고
나는 고 밑에 있는 일인용 침대에서 가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런데 이것도 타협이 되지 않았다.
서로 엄마 옆에서 자겠다고 앙탈을 부렸다.
하이고 참!
어쩔수없이 궁여지책으로 타협을 한것이 이인용 침대를 가로질러 자기로 결정했다.
여자 셋이 침대를 가로질러 누우려 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서로 가운데서 자겠다고 다투었다.
아이구~
어쩔수없이 딸 둘을 양쪽에 눕혔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다만 침대 밖으로 발 여섯개가 삐져나왔을 뿐이었다.
이윽고 불을크고.......
\"음 조타 조타.\"
\"음 ~ 조아.\"
두놈이 연이어서 조타를 반복하였다.
그러고 보니 베게도 침대 모서리에 반쯤 걸쳐 있었던것 같다.
덧 붙이 자면 우리 여자 셋의 키가 똑같이 162 센티에서 머물러 있다.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불편하다는 말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행복했다.
아주 오랫동안 추억으로 간직하리라.
그리고는 우리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한번도 엄마랑 한 이불속에 누워 본 기억이 없다.
친정에서 잠을 자 본지도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아니 엄마 손을 잡아 본 적이 없다.
불현듯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딸은 이러는데 왜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하지 못할까?
참 이상한 일은 나는 친정 엄마와 맞지 않았다.
그 중 제일 안 맞는 것은 친정 엄마의 아들 선호 사상이었다.
나는 딸 셋을 이렇게 애지 중지하면서 물로 빨고 사는동안
우리 엄마는 내가 처한 신세가 비통 그 자체였었다.
\"너도 쓸것을 낳아야지 \"
듣기 싫었다.
내가 셋째딸을 낳고 한달도 안 되어서 경상도 어딘가에 있는 용한 무당을 찾았단다.
울엄마 하시는 말씀
\"내가 너 때문에 점까지 다 보러갔다.\"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딸 셋에 치어서 사는 건지 죽는 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큰아이가 세번째수술을하고 기브스를 막 떼어 낸 직후인지라
그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와야 했다.
그러나 친청 엄마한테 한번도 내 딸을 데려와 달라고 하지 못하였다.
왜!
내가 아들을 못 낳고 딸을 낳은 죄 때문에.
참 많이 슬펐다.
사람들이 말했다.
진짜 친엄마가 맞냐구.
그러나 부인할수없는 친 엄마인것을.
내가 훗날 알아 낸 것은 부모든 자식이든 서로 자기 성격대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우리 엄마는 내가 아들을 못 난 것에 상처가 너무 커서 그러셨던 것 같다.
얼마나 야속하던지
그때 엄마하고 생긴 갭을 아직도 벗겨 내지 못하고 있다.
불쌍한 울엄마!
그까짓 아들이 뭐라고.
그때 나에게 조금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우리 큰딸을 학교에서 데려다 주었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나는 큰 아이 교통사고 이후로 아이가 혼자 길을 걷지 못하게하는 불치병에 걸려있 었다.
지금 고등학생인데도 그애가 혼자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후닥 거린다.
이병은 아마 내가 눈을 감아야 치료가 될것같다.
그런데 그때 초등학교 이 학년 아이였는데 기브스를 허벅지까지하고 있다가
떼어낸 직후였는데.
산모랍시고 누어서 쉬다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시간이 되면
후다닥 속이 뒤집혀 학교를 향하여 뛰기 시작 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우리 오빠가 어린시절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제대로 못 썼다 했다.
불편한 자식 길러 본 사람이 그 고통을 알진데 왜 내 엄마는 그것을 생각치 못하셨을까
이것이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겪던 아픔을 딸이 겪게 되어 피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나보다 났다.
의술좋고 돈 쳐들이고 니 오빠는 그때 걷지도 못했다
니 아버지는 나이가 어려 철딱서니 하나없고
십리길 이십리길 용한 의원 찾아 업고 달리는 내 심정을 알것냐.\"
그런데 왜 울엄마가 내 아픈 가슴을 몰랐을까.\"
정녕 피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 세월이 10 년이 다 되어간다.
내 엄마도 이제 연세가 높아 옷을 갈아입을 시기가 다아옴에
무엇을 용서를 하고 말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알아낸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하매 있어서도 자기 성품대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딸 아들 쑥쑥 낳아 종가짓 대 이을 자손 낳지 못한 한탄으로
아리 아리 뭉쳐진 가슴을 쉽게 쓸어 내지 못 하셨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부질없는것을.
아프지만 모두가 지나간 추억인것을.
나는 과거보다 현실이 중요하니까 모든것을 쓸어내려야지.
또 하나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의 량은 동량이라는 것.
딸 셋을 낳아 기르면서 한번도 위로를 받을수 없었지만
그래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만 지금은 아무 원도 한도 없다.
왜!
세딸 아이들 존재만으로도 이미 받을 것 다 받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리니
운명아! 내가 간다 악귀는 다 비켜라.
나는 오늘부터 더 포실 포실 웃을테니
나를 보는 모든이여 나를보고 해탈 하오소서.
그리고 나도 내 딸들처럼
엄마가 앉았던 자리에앉아보고
아버지랑 엄마 가운데서 자보기도하고
엄마한테도 나만처다보라고 앙탈하고 아버지한테도 나만처다보라고 앙탈을 부려보아야지
내나이 그 무엇이 두려우며 그 무엇을 용서하지 못하리
모든것이 다 부질없는 것인 것을.
그래서 내 부모님 옷을 갈아입을때 훌훌히 맺힌마음없이 떠나게 해 드려야지.
오랜 숙제가 풀린것 같다.
이제는 알수 있을것 같다.
모든 행복의 열쇄는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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