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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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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BY 동해바다 2007-02-15


     5.

     내면의 환상을 벗고 지금 처해있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허울좋은 체면으로 옭아 매어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기에 나 또한 물들어 그의 잘난 체면 따위를 흉내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라온 성장과정이 그를 너무 유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일까.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 가정을, 그리고 남편을 상대로 치료받고 싶
     었다.

     어린시절 잠시 어렵게 살긴 했지만 철들 무렵부터 그의 집안은 돈이 굴러 들어오기 시작
     했다. 은행에서 직접 수금해 갈 정도로...
     많은 것들이 돈으로 해결되었다. 고교전학도, 모든 사후 처리문제도, 취업도...
     \'쟤가 옛날엔 순했는데 군대를 공수부대 다녀오더니 저렇게 변했다\'
     돌아가신 어머님은 당신에게 밉보인 행동을 하거나 술마시고 험악해지면 단골메뉴인 청
     년 군시절을 거론하곤 하셨다. 

     그는 2남 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차갑고 냉정한 장남보다 여리고 정많은 작은아들을 더 예뻐하셨다. 
     어머님은 자신을 닮은, 어디를 가도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큰아들을 더 관심기울이고 신
     경쓰셨다.
     큰아들은 공부 밖에 몰랐다. 시골에서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더니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겠다고 하여 서울에 집을 장만하고 장남부터 올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큰딸 작은딸, 공부에 관심없는 둘째인 그이만 시골집에 남아 부모님과 
     함께 생활 하다가 고2무렵 자신도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떼를 썼단다.
     아버님은 전교에서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오르면 보내주겠다고 했고 그는 기를 
     쓰고 공부를 해 갈수 있었다고 했다.

     군 제대후 복학도 하지 않은 채 두 분이 운영하시던 가구점을 조금씩 도와 나가던 중 독
     립해 일하다 몇달 만에 말아먹고 술 마시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던 청년시절, 아버님께 
     쫓겨나다시피 서울로 보내졌다.

     첫번째 직장을 아버님이 나서서 구해주시고 두번째이자 마지막인 법원 공무원도 고위직
     인 아버님 친구 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가 탄탄대로 잘 나가던 날들이였다. 서른을 갓 넘어 나를 만났고 난 그의 심성과 착
     해만 보이는 인상에 결혼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그는 아니 우리는 부모님이 닦아놓은 순탄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박봉의 공무원 생활에 어려움이 있을까 싶어 나 몰래 아버님은 그이에게 용
     돈조로 조금씩 더 송금해주었을 정도이다.
     욕심없이 잘 살아나갔다. 남편은 신혼시절부터 부모님은 우리가 모셔야 하며 언젠가는 
     시골로 내려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객지생활에 월급받아가며 알뜰히 저축하여 두 
     아이 심성 착한 아이로 키우며 살아온 우리를 부모님들은 인정하며 고마워했다. 

     공무원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늘 그만둔다고 말하던 그는 93년경 사직서를 제출하고 
     시골로 내려갈거라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마침 50여평 대지 위 3층 건물을 작은 아들 명
     의로 지어놓고 언젠가 우리가 살 집이라 말씀하셨던지라 퇴직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긴 
     하셨어도 늘 애가 쓰인 둘째아들 식구 내려와 산다하니 내심 기쁘셨나보다.
     비빌 언덕이 있었기에 그는 미련없이 털어버리고 내 의사는 무시당한 채 결혼 10년차 우
     리 네식구가 거처할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상가건물 2층에 당구장을 개업하고 4년정도 운영하였다. 그런대로 벌이는 괜찮았다. 하
     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몸이 많이 망가졌다며 그만두고 싶다고 했고 그럴때마다 난 묵인
     하고 받아들였다. 참 살면서 보탬이 되지 않는 여자, 바로 나였다. 설득하고 용기를 주어 
     어떻게서라도 버티게 해주어야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가져본다. 

     귀향후 2년 지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평생을 아버님께 의지하던 어머님은 살고계신 건
     물중 토지만 큰아들 명의로 돌려 놓으셨다. 그리고 임대료를 받으며 어렵지 않게 돈에 의
     지하며 풍족하게 사셨다. 

     명망높은 큰아들은 어머님께 어떤 힘이 되었을까. 
     오래전 현금 3,500만원으로 강남의 금싸라기 땅을 사려다 큰아들 제지로 그만두셨다고 
     한다. 그 돈으로 자신의 유학비를 대달라고 ...
     정치에 꿈을 갖고 있던 그는 보기좋은 간판을 가진 K여고 E대학 출신 지금의 형님을 만나 
     결혼을 했고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장남은 젊은 나이에 박사코스까지 밟아 서울 유명대학 교수자리를 얻어 승승장구 잘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머님껜 큰 자랑거리였다. 
  
     복막투석으로 몇년을 앓다 마지막으로 8개월을 병원에서 투병하셨다.
     강릉까지 이틀이 멀다하고 우리 내외는 이지가지 반찬만들어 어머님을 돌봐드렸다.
     돈이 있어 다행히 간병인을 두고 투병하셨으므로 장남이나 우리가 편하긴 더할  나위 없
     었다. 큰아들 내외는 한달에 한번 정도 내려 왔을까. 그래도 늘 기다리는 사람은 큰아들 
     밖에 없었다.

     입원하여 돌아가시기 단 며칠만이라도 장남 집에서 따뜻한 밥 한끼 드시고 싶어도 
     눈치보여 말씀을 못하셨다. 만만한게 우리 둘째였다.
     궂은 일 힘든 일은 우리를 불러 다 시키고 결국 병원에 계시면서 시골의 전답과
     살고 계시는 재산 모두를 우리 몰래 형 명의로 돌려 놓으셨다. 어차피 형의 재산이라는 
     것은 다 알고있는 기정사실이였다. 그런데 치매로 오락가락 하시며 복막염을 앓고 계신 
     병환 중에 불러들인 형에게 왜 우리 몰래 넘겨야 했는지...
     분명 누군가의 소스를 받지 않고는 그렇게 할리가 없었다.
     무지하고 투미한, 술로 방황하는 작은아들이 그렇게 보기 싫었을까.
     정작 피해하나 준 일 없는데 그들에게 우리는 간혹 필요할 때 써 먹는 일회성 인간에 불
     과했던것 같다.

     술이 원인이 되어 파탄까지 오게 된 우리 가정,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재산은 형에게로 모두 넘어갔지만 그 건물에서 나오는 두 개의 집세를 우리가 쓰고
     있었다. 일을 해야했지만 IMF와 경기 하향세로 쉽게 덤비지 못하고 남편은 근근히 있는 
     돈을 까먹어가며 지금까지 7년 백수생활을 버텨왔다.
     술과 병원 그리고 폭력...자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는 그의 유약함에 나의 우유부단한 성
     격까지 합세하니 무슨 회생을 바랄수 있었겠는가.

     의지할대라고는 형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정작 만나면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형제였고 쌀쌀하기 그지없는 형을 그래도 형이라고 의지하고 기댔건만 순식간에 
     꺼져버린 촛불처럼 형도 명이 짧았던지 추운겨울 심장질환으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3년 동안 작은고모부, 어머님, 형의 초상을 내리 치루고 그는 더욱 무너져갔다.
     우리끼리라도 잘 살자고 한 약속은 하루 아침에 형수 앞으로 넘어간 모든 재산에
     미련과 욕심이 그를  휘어잡으며 무너뜨리고 말았다. 시골의 전답, 20억상당의 건물, 
     서울의 아파트 두 채 이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도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형수의 말에 기함을 하곤 만만한 내게 화를 내고 술을 마셔댔다.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에게 들어오는 소득 그것에 맞춰 잘 살아보자는 나의 의견은 
     묵사발이 되버리고 신경은 곤두설대로 서 형수에게로 향한 분노만이 그를 점점 악마로 
     만들어 버렸다.

     재산이 형수 앞으로 넘어가면서 그곳에서 받던 집세도 우린 힘없이 내 줘 버리고
     최악의 경기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건물 두 곳에서 나오는 집세 130만원이 수입의 전
     부였다. 
     그것도 한 곳은 몇달 째 밀린 상태였으니 빚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얄궂은 자존심으로 형님에게 매달리기가 나 역시 싫었다. 약자의 헛점을 이용해 챙길건 
     다 챙기는 철면피...그땐 그렇게만 느껴졌다.
     사람은 똑똑하고 볼 일이였다. 인간의 도리, 양심, 선, 그런 것은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들에게만 어울리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 아주 작은 집 하나 얻어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체면유지와 부모님이 내어주신 재산이 그를 더욱 옭아매고 있었다.
     부동산이라는 것이 절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였다. 갖고 있다는 것 하나만
     으로 세금과 이에 부응하는 각종세금들이 쓸데없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밀려드는 압박감, 가장의 체면은 완전히 부서져 버리고 들어와야 할 소득은 없는 상태에
     서 이제 체면불구하고 그이나 나나 나서서 벌어야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

     2007년 황금돼지해가 밝았다.

     다시 시작된 그의 술병으로 딸아인 서울로 올라와 내 거처에 함께 있었고 근 한달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던 보수도 든든히 받아 그야말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계속 일하겠다는 나를 만류하고 점주는 4일간의 휴식을 권했다. 

     4일째 되던 날, 원룸에서 딸은 늦은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올케언니와 야트막한 산에 
     다녀오던 참이었다. 
     음지의 산길, 미끄러운 눈길을 엉금엉금 내려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어디세요. 119에 아저씨가 실려 갔다는데, 보호자하고 연락이 안된다구요.
     위독하다고 하는데 빨리 오셔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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