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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김장 이야기


BY 무지개 2006-11-28

 

오늘은 흐려서 좋은 날이다

무성하게 우거져 전망을 가리던 감나무와 아카시아가 이제는 휑하니 가지만 드러낸 채 서있는 초겨울이다.

여름철 꿩들이 안식처로 삼고 드나들던 무성했던 풀 섶도 된서리에 누렇게 쓰러져 버리고 이제는 멧새들만 가끔씩 앞마당에 내려앉는다.

푸성귀들이 올망졸망 자라 올라 늦가을까지 보기 좋았던 작은 텃밭은

김장 배추를 뽑던 날 떼어낸 겉잎들로 덮여 쉬고 있다.

아래마당 건너에는 시골 태생의 금실 좋은 내외가 살고 있다 아마도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 들어 온 후 서툰 시골생활로 궁금한 것이 있을 때 내려가 물으면 친절하게 해결책을 알려주시는 분들이시다

더위가 한풀 꺾이던 팔월 말쯤 그 아저씨가 종이컵에 키운 배추 모를 서른 두 포기나 건네주셨다 시골 인심은 늘 그렇게 따뜻하고 고맙다


평생에 처음으로 내가 먹을 배추농사를 시작하며 뿌듯해지는 마음이란!

기왕지사 내손으로 배추농사를 하는데 화학비료를 뿌려가며 기를 일이 아니어서

벌레가 먹다가 남긴 것만으로 김장을 하리라 마음을 굳히고 천연퇴비와 유기농비료를 구입해서 밭에 듬뿍 뿌려주고 땅에 고랑을 내고 흙을 돋아 이랑을 만들어 배추모를 옮겨 심었다

하루가 다르게 벌어져 가는 배추를 보기위해 몇 시간이 멀다하게 잦은 발걸음을 하며 밭을 들여다보는 마음이 천석꾼 못지않게 즐겁기만 했다

흙이 가진 생명력에 날마다 놀라며 신기해하는 초짜 농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연한 잎들이 솟아오르면서 벌레구멍도 나날이 늘어가 안타깝게 걱정했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마구 늘어나던 벌레구멍이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는 가뭄이 이어져 걱정스러웠는데 배추가 다 자랐을 입동 무렵부터는 잦은 비가 내려 또 걱정스러웠다

가뭄이 이어지던 시기에도 습기가 적당히 있은 토질이라 일부러 물을 주는 수고는 하지 않고 고냉지 배추를 기르듯 했다

입동이 지나면서 산간에는 일찍 서리가 내리고 새벽이면 간혹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 살얼음이 얼고 배추도 겉잎들이 살짝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애써 지은 무농약 유기농 배추가 얼어서 못쓰게 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결국 조금 이르게 김장을 담기로 하고 여든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와 서 너 명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셋째주말에 김장을 담기로 했다


김장을 담그는 일은 잔치를 치루는 집처럼 늘 부산하기만 하다

재료를 준비할 때부터 마무리까지 왜 그렇게 잔일이 많은지 모른다

이곳은 시골이라 장서는 날을 택해 가야 싱싱한 채소들을 살수가 있다

하루 일찍 김장을 도우러 집에 오신 친정엄마를 모시고 시끌벅적한 장터에 나가

갓이며 미나리 골파 대파 무 등 김장 부재료들을 사는 일부터 시작해서 손질을 해두니 이미 반 김장은 한 기분이 든다

이튿날 드디어 알차게 자란 서른 두포기의 배추를 뽑아냈다

쓸 만한 겉잎들은 한 잎도 버려지지 않게 마음써가면서 알뜰하게 절여두고 밤 열두시 무렵에 한번 뒤집어 주고 나서 새벽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씻어보니 간도 아주 적당하게 잘 절여졌다 농약염려 없는 배추라서 씻으면서도 안심이 되어서 아주 좋았다

가족들은 무채를 썰며 그 옛날 추울 때 콧물까지 흘려가며 고생스럽게 김장을 하던 이야기를 하며 웃느라고 난리다

그 시절에는 서로 품앗이를 해야 많은 분량의 김장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친정에서 김장을 할라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대 여섯 분 어우러져 평상을 펼치고 우물가에 피워 둔 석유난로에 곱은 손을 녹여가면서 배추를 씻기도 했다 옛날의 겨울은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두들  시퍼렇게 얼은 몰골로 해가 지도록 고생들을 해야 했다 나는 늘 우물물을 퍼 올리는 담당이었는데 그때 고생스러웠던 일은 지금까지 가족에게 훈장처럼 써먹고 있다 고생스럽던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곰삭아서 웃음이  되는가보다


젓국이 듬뿍 들어간 배추김치를 좋아하는 가족들 식성대로

잘 삭힌 생멸치 젓을 갈아 생새우와 새우젓을 함께 쓰고 오래두고 먹을 김치에는 생태를 갈피마다 섞어 담았다 바닷가에서 자라신 엄마는 김장때면 싱그러운 맛이 나도록 청각을 꼭 챙겨 넣으라고 당부를 하시는데 금년에도 어김없이 청각이 들어갔다 그릇에 차곡차곡 담겨가는 포기에 절여둔 무 토막도 몇 개씩 얹었다

배추를 씻다가 남은 푸른 잎과 속잎들은 물기를 빼고 잘게 썰어 파 마늘과 고춧가루 소금으로 간을 해서 버무려 두었다

국이 마땅치 않은 날에는 쌀뜨물을 받아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한 주먹씩 넣어 끓여 먹는 것인데 그것도 친정어머니의 특별한 요리인지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음식이다 진잎 국이라고 불리는 이것에 동태와 콩나물을 섞어 끓이면 해장국처럼 시원한 국이 되어 특히 친정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고무장갑을 안 쓰고 맨손으로 고춧가루를 만지고 배추 속을 버무리고 나니 손이 얼얼하고 화끈거려 고생을 하다가 우유를 조금 덜어내서 두어 번 닦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한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서 너 집이 나누어 먹을 많은 분량의 김장이었지만 서두른 덕분에 오전 중에 대충 일을 끝내고 남겨두었던 노란 배추 속으로 맛깔스런 겉절이를 만들어 돼지고기까지 삶아 보쌈을 먹는 푸짐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런 점심식사는 김장때 아니면 또 언제 즐기랴. 식구들이 둘러앉아 이렇게 음식잔치를 벌려보기도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

다른 때보다 점심식사를 과식한 탓도 있지만 할 일을 해놓은 만족감으로 배는 더 부른 법이다

집에서 담은 김장김치를 기다리던 아들내외는 김치를 가져간 날부터 꺼내 먹을 만큼 맛이 있다고 즐거워하고 올케와 친정엄마도 배추가 맛이 좋다고 만족스러워하신다 특별히 올해는 손수지은 유기농 태양초로 만든 고춧가루가 들어갔으니 김장 맛이 더 일품인 것 같다

도시에 흐르는 메케한 냄새 없는 청정한 이곳에서 언제까지 시골생활을 누릴지 모르지만 머무는 동안은 고생스런 유기농 김장행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눈 때문에 읍내로 나가는 일이 어려워져도 올해는 넉넉한 김장김치 때문에

푸근한 겨울이 될 것 같아 마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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