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의 기온이 춥고 을씨년스럽다.
낮에는 햇볕이 나다가도 해만 지고나면 찬기운이 물려오는 것이 겨울이 우리곁에 바짝 다가 와 있는 것 같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는 한국의 공중목욕탕 생각이 절로 난다.
미국 온 지 17년 째, 그런대로 정 부치고 살고 있지만 제일 그립고 아쉬운 게 있다면 한국의 공중목욕탕이다.
특히 이렇게 몸이 옹승거려지는 날씨에는 더운 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공중목욕탕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걸치고 있는 옷을 다 벗어버리고 뜨거운 물 속에 풍덩 들어가 목까지 잠그고 딱 십분 만 유유자적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몸의 피로,머리속의 혼돈,마음속의 찌꺼기까지 더운 물 속에서 싸악 녹을 것만 같다.
사실 이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중목욕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듣기로는 한국의 목욕탕만큼 시설이나 규모가 제법 괜찮다고 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는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서는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내가 못가는 이유는 단하나, 바로 아는 얼굴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많은 한인들이 영입돼 왔다지만 워낙 적은 소도시라서 그런지 이웃사촌이란 말을 실감할 정도로 웬만한 한인들의 얼굴들은 거의 다 익히고 지낸다.
서로를 잘 알고지내는 만큼 소문도 빠르다.
한인과 관계된 사건, 사고가 났다하면 그 다음날로 온 한인사회에 소문이 퍼지는 곳이다.
특히 나는 지난 10여년 동안 신문 일을 했기 때문에 더욱 아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어줍게 목욕탕 한번 갔다가 죽기살기로 가려온 내 몸매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목욕탕을 갈 수가 없다.
실제로 목욕탕을 다녀온 몇몇 여자들의 입에서 \'누구는 히프가 쳐졌더라\' \'누구는 배가 삼겹으로 늘어졌더라\' 하고 흉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같이 몸매가 형편없는 여자는 아예 목욕탕 가는 걸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고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있다.
나이 50이 넘어도 여전히 탱글탱글한 피부와 몸매를 간직하고 있는 L씨는 목욕탕 마니아다.
아무리 피곤하고 시간이 없어도 한달에 서너번은 꼭 목욕탕엘 간다고 한다.
어떤 땐 일주일에 두어번씩이나 갈 때도 있다고 하는데 입장료랑 때미는 아줌마 봉사료등이 만만치 않지만 힘든 이민생활에서 자신에게 하는 유일한 사치라 생각하고 마음편하게 간다고 한다.
언젠가도 저녁을 먹기위해 모두 만났었는데 그녀는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한 채 나타났다.
목욕탕에서 바로 왔다고 했다.
목욕탕에서 갓 나온 여자의 피부는 어쩌면 그리 매끄럽고 부드러운지...
자신있게 목욕탕에 다니는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심술도 나서 \"목욕탕에서는 모두 홀랑 벗고 있을 텐데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찌하요? 나는 가고 싶긴 한데 누굴 만날까 봐 두려워서..\" 했더니 L씨는 \"어쩌기는 뭘 어째, 안녕하쇼,하고 천연덕스럽게 인사하지.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노? 누구는 없는 것 달린 사람 있나. 저나 나나 달린 건 다 똑같은 데\" 하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목욕탕엘 못가는 사람이 나 뿐만 아닌 모양이었다.
한인타운에서 융자관계 일을 하는 또 다른 L씨는 아닌 게 아니라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팍팍 쌓일 때는 점심시간에라도 잠깐 짬을 내어 목욕탕에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꿀뚝같다고 했다.
뜨거운 물과 향기좋은 비누로 몸을 씻고 맛사지라도 받고 나면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다 날라갈 것 같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못가는 이유는 자신의 고객과 적나라하게 벗은 몸으로 마주치지 않고 싶기 때문이란다.
\"내 손님의 90퍼센트가 한인이고 한국 목욕탕은 하나뿐이라 거기 갔다가는 벗은 채로 고객을 만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그 어색함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렇다고 옷을 입고 들어갈 수도 없으니 아예 안가고 마는거지, 아니 못 가는 거지....\"
대신 그녀는 공중 목욕탕의 뜨거운 물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한다고 한다.
나도 몸 컨디션이 좀 안좋다 싶으면 집 욕조에 물을 받는다.
다행히 새로 이사온 집에는 둘이 들어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한 욕조가 있다.
그러나 몸을 푹 담그는 것 까지는 아쉬운대로 괜찮은데 한국처럼 바닥에 물을 쫙쫙 끼얹을 수가 없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목욕을 끝내고 나면 욕조를 닦아야 하는데 이 일이 또한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일 아쉬운 일을 꼽으라면 집에서 하는 목욕은 혼자이기 때문에 심심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공중 목욕탕에서는 다른 이의 몸매를 옆눈으로 힐끌힐끌 감상할 수 있고 엄마를 따라온 아기의 오동통한 볼을 만져볼 수도 있었으며 탕안을 마음대로 활개치며 다니다가 내 또래의 여자에게 말을 걸어 등의 때를 서로 밀어주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패거리로 몰려온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재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목욕탕에 오는 아줌마들은 대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가정사를 풀어놓곤 했는데 남의 일에 관심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나는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딴청을 피우는 척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곤 했다.
그때 들었던 아줌마들의 가정사는 지금 나의 소설이나 꽁트 재료로 유용하게 써 먹는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큰 멍에를 진 채 살아가야 했던 한국의 주부들은 한번 목욕탕에 갔다하면 보통 서너시간을 소일했는데 지금처럼 딱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데가 없는 그 시절엔 목욕탕만이 그녀들에게 큰 위안처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도 변해 예전처럼 커다란 탕하나만 달랑 있는 목욕탕은 찾아보기 어렵고 몸에 좋다는 온갖 최신식 설비를 갖춘 목욕탕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그런 최신식 설비를 안갖추어도 좋으니 오다가다 마음놓고 들릴수 있는 공중 목욕탕 하나만 가까히 있었으면 좋겠다.
물질의 풍요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미국에 살면서도 나는 80년대의 후진 공중목욕탕이 너무도 그립다.
-이민자들 삶과 애환이 담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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