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견병 예방주사를 맞고
‘육체적 고통’을 떠올리면 나는 티벳의 고행하는 사람들이나 자기 몸을 괴롭히는 종교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생각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얼마나 병원신세를 많이 졌길래 쯧쯧쯧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병원신세를 거의 진 적이 없다.
수술이라곤 사랑니 뺄 때 딱 두 번 한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병원에 대한 원초적 공포심이 있다. 아직 따끔한 맛을 못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병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병이
있어도 시름시름 앓다 집에서 죽지 병원에서 온갖 수술에 온갖 바늘을 몸에 꽂고 살면서 견뎌낼 자신이 없다는 것.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미미한 증상으로 병원에 가서 진찰도중 워낙 흥감을 떠는 바람에 의사로부터 진료거부를 받기 직전까지 간 적조차
있다.
내가 이렇게 병원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초중학교때 예방주사탓이 크다. 그 시절 예방해야할 것은 오죽이나 많았는가. 일본뇌염
예방주사, 간염예방주사, 콜레라 예방주사, 장티푸스 예방주사에 뭘 예방하는 건지 모를 불주사까지... 중2때는 일본뇌염
예방주사를 맞고 100미터도 못가 쓰러진 일이 있었으니 주사가 병원공포증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내가 독일에 오니 주사맞을 일이 없어서 좋았다. 툭하면 주사를 맞히는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선 병원엘 가도 주사를 맞은 적이 없었으니. 그런데 예기치않은 이유로 한번 왕주사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한 3년 전이었나 보다. 하루는 사장님이 개를 데리고 왔는데 개가 진종일 사무실에서 낮잠만 자는 것이었다. 나는
오도방정을 떠느라 낮잠자는 개를 놀래킬 심산으로 멀리뛰기를 하듯 멀리서 뛰어와 잠자는 개앞에서 도움닫기를 하느라 힘을 모으고
있는데 갑작스런 쿵소리에 놀란 개가 잠에서 깨어 얼떨결에 내 다리를 물었던 것이다. 사장님에 따르면 그 개는 온순하기 그지없는
친인간형 개인지라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굴 물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문 개에게 혼꾸녕내는 ‘시늉’만 하셨다. 물린
나는 섭섭했다. 하지만 개에게 죄가 있으리오. 죄가 있다면 오도방정을 떤 내죄었다.
다리를 보니 상처는 보일락 말락 했고 피도 바늘에 찔린듯 조르르 흘렀지만 마음이 안심찮았다. 조퇴를 해서 집에 와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는 이거 큰일났다며 괜히 내 마음을 더 언짢게 만들었다. 당장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으라고 난리를 치시며
방만구씨한테 전화를 해서 얘를 꼭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하신 모양이었다. 전화는 괜히 해서 일을 벌여놓았다. 우리 시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태국이나 중국으로 여행갈 때 꼭 간염예방주사와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으라고 엄포를 놓으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냥 웃고 넘어가기엔 뭔가 껄쩍지근한 그 무엇이 있었다.
‘만의 하나 내가 광견병에 걸려 개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다른 병도 아니고 곱상하지 못하게시리 광견병이라니... 차라리 주사를 한방 맞자!’
늦은 시간에 예약도 없이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서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았다. 간호사가 들고 들어온 주사기는 왕주사기였다.
초중학교 예방주사를 맞을 때 하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이즈에 침도 무지 길었다. 나를 따라간 방만구씨는 빈들거렸다.
‘니 엉덩이가 얼마나 두꺼웠으면 그 긴 침이 다 들어가더라.’
간호사는 조그만 쪽지를 주며 다음에 또 맞으러 오라고 했다. 광견병 예방주사도 간염 예방주사처럼 1차, 2차, 3차 하는 차가
있는데 그걸 다 맞아야 효험이 있다나. 하지만 광견병에 대한 공포도 왕주사기에 대한 공포를 누르지 못했다. 나는 그 후 다시는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지 않았다.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남편은 내가 조그만 고통에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을
자기가 생각해낸 글인양 말했다. ‘현대인은 고통에 너무 민감하다’고.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마취없는 수술이 행해졌고 1,2차
세계대전때는 마취없이 사지를 절단하기도 했으며 현대에도 아프리카나 아마존 유역에서는 마취없이 시술되는 수술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문명사회에서는 마취가 잦단다. 가장 자연스러워야할 애낳을 때 조차 무통분만을 시도하니 세상이 살기 편해지면서 사람들의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이 쇠퇴하였다나.
아프리카의 마취없이 시술되는 수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한때 이 수술과정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도 있었다. 한 서구인
의사가 논문을 쓸 요량으로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마취없는 수술에 대해 촬영하고 공부했는데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큐멘터리로 남긴
것이었다.
한 아저씨가 11살짜리 꼬마의 머리를 가르려고 하고있었다. 꼬마는 평소에 두통을 호소하여 수술이 불가피 하였단다. 동네사람들이
죽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고 그중 5명의 어른이 꼬마의 머리와 몸을 붙잡았다. 아프리카인 의사의 수술도구는 한바가지의 물과
면도칼이 전부였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의사는 바가지에 담긴 물로 손을 씻은 뒤 면도칼로 소년의 머리를 갈랐다. 여러번 칼질을 해서 뼈가 보이자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여러번 문지르고 마지막에 가서는 손씻은 물로 상처부위를 헹구어주고는 머리를 닫았다. 머리를 닫을 때에도
바느질은 하지 않고 흡사 쩍 벌어진 석류를 닫듯이 머리 양부위를 밀고 천으로 단단하게 옭아 매었다. 수술이후 꼬마의 머리와 눈이
퉁퉁 부었는데 의사는 며칠간 어떤 식물의 잎에서 나는 진을 발라주는 것으로 치료를 끝냈다.
내가 보기엔 영락없이 돌팔이 시술인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 꼬마는 수술후 두통이 싹 사라졌으며 10년 가까이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수술자국은 거의 없어져 지금은 어딘가에 살짝 긁힌 상처처럼만 보였다. 이런 수술은 아프리카에서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단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니(너무 끔찍해서 드문드문 봤다) 마취없이 행해지는 수술이 일상화 된다면 환자의 입장에서도, 행하는
입장에서도 그게 그리 끔찍할까 싶다. 생각해보면 다리 쩍 벌리고 동전구멍만한 구멍으론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아기도 꺼내는데
마취없이 머리가르는 일이 그리 끔찍한 일일까?
그리고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문명이 덜 발달된 곳에선 사람들이 감수해야할 육체적 고통이 크다고만 할 순 없을 것 같다.
문명이 발달된 곳에서도 사람의 감수해야할 육체적 고통이 적다고만 할 순 없을 것 같고. 육체적인 고통은 상대적이다. 이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를 보고 느낀 ‘고통의 상대성 이론’이다.
‘고통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다음에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을 땐 부분마취를 요구해야할 것 같다. 나는 다른 곳이 아닌 병원에서는 고통의 상대적인 의미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커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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