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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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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전거.


BY 일상 속에서 2006-11-15

 

어제의 일도 가물가물한 내가 20여년도 훌쩍 거슬러 올라간 옛일들을 기억해내는 것이 신기할 때가 많다. 그것도 생생히, 머릿속에서 영상이 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마을의 언덕빼기, 수십 년은 서있었을 커다란 포플러가로수, 절벽만치나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던 논두렁, 밤낮없이 귀신이 출몰한다던 접근조차 두렵던 성황당, 낮에도 햇볕조차 들지 않던 신닥산에서의 호랑이 출몰 설... 등 그 모든 것들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요즘 자전거 배우기에 한창인 막내 아영이의 관심사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는 어떻게들 자전거를 배우게 된냐는 거다.

늘 입에 ‘왜?’를 달고 살던 것이 요즘은 ‘어떻게’로 바뀌었다.


“아빠, 아빠는 어떻게 자전거를 타게 됐어?”

TV 앞에 앉아서 심각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제 아빠의 입에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아영이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이라도 시켜놓은 양, 벌써 여러 차례 질문을 던졌다.

도무지 단순한(?) 나로서는 감히 정신의 세계를 가늠할 수 없는 심오(?)하기만 한 내 남편은 집요한 딸의 질문 앞에서,

“아빠는 할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자전거를 안고 나왔다. 그때부터 타기 시작했지.” 하고 만다.

난...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서 곧, 내 쪽으로 달려 올 아영이가 묻게 될 질문을 예상하며 모른 척 마늘껍질 베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집애, 분명이 쪼르륵 와서는 ’엄마!!! 아빠 말이 진짜야?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 아빠 거짓말이지?‘ 라고 하겠지? 하여튼 내 남편이지만 정말이지 애들한테 성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니까.’ 하며 속으로 궁시렁 거릴 때, 아니나 다를까, 아영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왔다.


“엄마!!! 정말이야? 아빠는 할머니 뱃속에서 자전거를 안고 태어났어? 그때부터 자전거 탔어?!!!”


진즉에 딸래미 데리고 EQ까지는 아니어도 IQ라도 테스트 해봤어야 하는 건데, 저 놈의 계집애는 순수한 것만은 아닐 거야. 분명 지능이, 수학 50점, 받아쓰기 40점의 실력과 저 말 같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구, 하는 짜증 섞인 생각마저 들었다.


“너는 그런 일이 정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짜증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그리스로마신화에서 헤라크레스는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걸었대. 그리고 자기보다 더 큰 뱀을 죽였다고 했는데? 그럼 그 말도 거짓말이야?”

“......”


이렇게 암담하고 환장한 일이 또 있을라나? 엉뚱한 말을 해놓고 태평하게 앉아서 TV삼매경에 빠진 남편이나, 요 며칠 째 만화 ‘그리스로마신화’를 보고 또 보며 알게 된 것에 대한 질문까지 인용해서 두 눈까지 부릅뜨며 바투앉아서 제 엄마를 대하는 순진한 표정 앞에서 나는 한숨이 절로 났다.


하긴 우리나라 설화에 등장하는 신비한 태생의 인물들도 몇몇 있지 않나.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나 ‘주몽’, 돌 밑에서 발견됐다는 노란 개구리모양의 ‘금와’왕, 등등... 그런 상징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인 딸을 또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하나 머리가 복잡스러웠다.


얼토당토않은 아빠의 신비하고 묘한 자전거안고 태어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그리스로마신화>까지 도달한 것을 정리해 주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진땀 흘리며 정리해준 제 엄마를 이제는 좀 해방 시켜주면 좋으련만 아영이의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자전거 배웠어?”

“초등학교 3학년 때, 혼자 배웠어.”

“헉! 혼자! 어떻게?”

<난 ‘왜’와 ‘어떻게’를 달고 사는 가시나의 버릇을 누가 좀 고쳐줬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진다.>

“엄마가 어릴 때는 길이 비포장도로였거든.”

“비포장이 뭐야?”

“-_-^”

계속해서 쏟아지는 질문들...하긴, 요즘 아이들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된 길만 보고 자라서 ‘비포장’이란 단어조차 생소할 것이다.

짜증스럽게 만드는 딸이긴 하지만 옛 추억을 되짚어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니 점점 퇴락하는 나의 기억력, 즉 정신 건강에는 도움이 되겠지. 고마운(?) 딸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자라난 작은 어촌 마을은 서해대교가 지나가는 바닷가이며 ‘행담도’가 바라보이는 비릿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 당시 자전거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붙어살던 이모 댁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TV를 장만했을 정도로 부유했다. 이모 댁은 번쩍번쩍 윤이 나는 자가용은 물론이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이 많았지만, 날 두 살 터울의 사촌 오빠가 제일 부럽게 만들었던 것은 노란색이 예쁜 삼천리 자전거를 갖고 있다는 점이였다.


자식들의 사기를 중요시 여기던 내 부모님은 이모 댁을 따라가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두 가지만은 마련하지 못하셨다.

한 가지는 자가용, 면허증이 없는 우리 집에서 그것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전거.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인 79년도 당시, 지금의 아영이 만큼이나 끈질기게 목적을 위한 자전거 타령으로 부모님을 졸라댔지만 두 분은 꿈쩍도 않으셨다.

몸이 약한 탓에 매일 골골하며 병원 출입하는 가시나가 속없이 자전거 타령을 해대니 나중에는 “기집애가 무슨 자전거야?!”라는 불호령까지 내리셨다.


두 발 자전거의 매력이라면 중심잡고 바람을 가르며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바람...

나는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서 느끼는 바람의 느낌보다 자전거를 타며 느끼는 바람의 맛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전교에서 제일 먼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 화려한 전적(?)을 이어서 여학생을 대표로 제일먼저 학교에 자전거 타고 등교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고집 앞에서 모든 것이 꿈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1년이 흘렀을까? 사촌 오빠는 1년간 열심히 타고 다닌 자전거의 색이 좀 발하고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이유로 새 자전거 타령을 해댄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더 크고 색이 멋진 자전거를 소유하게 됐다.

오빠의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는 그때부터 고물상이라도 가져가라는 듯 담장 밖에서 아무렇게나 기대어져 있었다.

기회도 찬스라는 말처럼 나는 어느 햇살이 좋은 일요일, 좀 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오빠의 헌 자전거를 끌고 가서 중심잡기 연습을 했다. 페달에 발을 올린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두 발을 중심으로 버티다가 쓰러지기를 몇 번, 도무지 그렇게 해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위엣동네’라 불리던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언덕빼기로 나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길옆으로 무시무시한 성황당이 있고 절벽처럼 아래로 펼쳐진 논두렁이 양쪽으로 있는 길을 타고 100M쯤 내려가면 내가 사는 아랫동네였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면에는 크고 작은 자갈들과 까다버린 굴 껍질들로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참으로 겁이 없었다. 그 기세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지...)

그렇게 까마득한 언덕에서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오기로 브레이크도 들지 않는 자전거에 올라타선 두 다리를 쫙 벌린 채로 아래를 향해 질주를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중심을 잃지 않고 무사히도 잘 내려왔다. 중심을 잡았다는 것에 마냥 신이 난 나는, 다음번에는 페달에 발을 올린 채로 내달렸다. 그렇게 중간쯤 내려갔을 쯤, 고기잡이를 끝낸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밀며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들지 않는 브레이크를 본능적으로 눌러대며 내달리던 나는 자전거의 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올라오시던 어른들도 리어카의 방향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며 “브레이크를 잡아야지!!!” 하셨다.


그때 나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차림새로 자전거를 타던 나는 공중을 날아 초록빛이 예쁘게 잘 자란 벼들이 폭신한 논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라신 마을 어른들과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이 뒤늦게 달려오셨다.

내 밑에 남동생은 하지 말라는 낚시를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마당에 있던 장작으로 사정없이 맞았었다...

그 일을 상기하며 나는 얼굴이 상기된 채 달려오신 부모님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입을 여셨다.

“겁도 없이 고장 난 자전거를 언덕에서 타고 내려와?!!!...... 네 고집을 누가 말려. 자전거 사줄 테니까, 다신 저 자전거 타지 마라.”

그날 힘들게 바다 일을 마치진 부모님은 논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둑한 저녁 쓰러진 벼들을 세워야 하는 수고까지 하셨다.


다음 날 내게도 새 자전거가 생겼다.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혼자 터득한 자전거 실력을 부모님 앞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루 1시간 이상 마을에서만 타야 한다는 부모님과의 약속을 한 뒤였다.

그러고 보면 난 터무니없는 사건사고를 많이도 만들어대며 유년을 보낸 것 같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남의 집 트럭 바퀴에 구멍 낸 것, 한 살 어린 남자 아이의 머리를 낚시 바늘로 낚은(?) 일, 맛있다는 사실로 친구들과 바닥이 들어나도록 마셔댄 커다란 항아리의 포도주, 숨바꼭질하며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이 숨어서 잠이 든 탓에 동네 어른들까지 찾아 나서게 만들었던 일들까지...


이런 내가 조심스럽지 못하게 물병을 깼다는 이유로 내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30여분 이상의 훈계를 늘어놓기도 한다.


친정 부모님께선 나의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곧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네 에미가 어릴 적에 지 동생들 끔찍하게 챙겼고 한다면 꼭 하는 성미라 공부도 잘했다. 상도 얼마나 많이 탔는가 몰라. 그런데 네놈들은 왜 그리 극성스러운 거여. 누굴 닮은 거여?”...

그 말씀에 모두들 수긍하는 듯 조용하건만 태연한척 앉아있는 나는 옷 속,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곤 했다.

분명 부모님께 딸이라고는 나 하나건만... 누굴 얘기 하셨던 건지, 원...


마늘을 까는 동안 내내 나는 발설할 수 없는 몇몇 사실을 빼놓고 혼자서 터득했던 나의 자전거배우기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어느 틈엔가 아영이도 곁에서 마늘을 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아영이는, 제 친구들 모두 자전거 못 타는 애가 없다는 이유로 자전거 사달라며 나를 졸랐다. 옛날 나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며칠 전에 남편의 말류에도 무릅쓰며 빨강색 자전거를 사주었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남편은 아영이에게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수술한지 얼마 되지 않는 몸이기에 가르쳐주기란 무리였다.


아영이가 혼자서 배우겠다며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뒤에서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어쩜 그렇게도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은지...

다음 날, 나와 아영이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이 딸의 자전거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런지 30여분 만에 들어와서는 힘이 드신단다. 그래도 곧 터득할 수 있겠다나...

이럴 때 나는, 나와 남편의 육체를 바꾸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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