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문옆 무리진 코스모스도 검불만 남은 늦가을 ..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날이라 비교적 일찍 학교를 파한 소녀는 할배 생각에 잔망댈수가 없었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것도 아닌데 걱정되고 바쁜 마음은 지름길로 향한다
쇠소리 나는 철대문을 열자 더듬거리는 손으로 할배는 방문을 빼곰 열고 큰눈으로 소녀를 찿는다
역시나 몹시 기다렸다는걸 안 소녀는 베운동화는 빨리 벗겨지지 않는것이
흠중에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할배 방으로 들어섰다
지린내와 노인냄새가 함께 찌든 중환자 방.
소녀는 냄새따윈 몸에 배인지 오래라 별 거부감도 못느겼다
오줌싼 어린 남동생 중우 벗기듯 능란한 손놀림으로 할배의 축축한 내의를 벗겼다
그즈음에 할배는 당신의 막내딸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풍을 맞은 할배는 처음엔 아사증이 왔다고 하더니 이내 반신불수가 되시고 자리를 보존하셨다
정신은 초롱 같은데 한쪽으로 돌아간 입은 말까지 뺏어가
새어나오는 \"우우~\" 소리만으로 당신을 표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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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의 병세가 황달에서 점점 흑달로 진행되어 열달된 산모배처럼 복수가 채일때
다급하게 왕진오신 의사선생님이 할매의 맥을 짚는걸 확인하자마자
할배는 한숨 돌리며, 새벽같이 나가서 깜깜한 한밤에 돌아오셨다
손에는 귀하디 귀한 조약을 들고와서 손수 약탕기에 넣고 물을 달아넣고 불을 지폈다.
그 할배가 할매 가시고 이년만에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외로운 할배는 와중에 큰며느리까지 앞세우고 부터는 줄데도 팔데도 없는 놋대를 몇개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첫새벽이 희부옇게 트면은 할배는 장탉보다 먼저 일어나 비질하고 대패질 하셨다
한치틀림도 없이 먹줄 팅겨 나무 재단하시고
이른아침 이슬 털듯 얇게 저며지는 놋대로 스럭스럭 새벽을 깎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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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는 통영사람이었다
충무 세병관 근처 보통학교만 다니셨지만 한글과 한자 필체가 유려했었다
당신의 세아들 필체는 부친의 서예소질을 물려받아 소녀의 아버지는 일찌기
왜정시절 어느 기관에서 인정을 받은 서예가 필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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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할배의 말소리를 몇마디 기억하지 못한다
거의 말수가 드물었으므로 오로지 할매의 푸념에 섞인 할배의 탄식이 뇌리에 있을뿐이다
할배는 남들이 알아주는 할매의 정갈하고 맛난 음식솜씨조차 성에 차지않아
옹고집에다가 까탈마져 부려 두분 살아생전 평생 아웅다웅 다투시던 한마디,한마디만 드물게 남아있었다
\"잡기장 \" 이라고 쓴 공책에도 목수일에 관한 전문적인 기술만 꼼꼼히 적어놓았지
당신의 어느 마음 한자락도 형상화 해놓지 않으셨다
갈수록 노를 사러오거나 어선에 필요한 나무 부품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뜸뜸해 질때쯤
할배는 노 대신 공구를 팔아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듯하게 재 놓은 나무 혼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한번씩 낯선 아저씨들이 할배의 애장품을 리어카에 싣고 나갔다
언제부턴가 할배의 창고에는 대패도 끌도, 한소끔의 톱밥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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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라곤 없으신 분이 일부러 말을 할라고해도 어느날 부터 한마디도 할수 없었다
그리고 수족도 원활히 움직이지 못했다
막내고모는 앞집에 살면서 들며나며 친정아버지 수발을 들었는데
할멈 없이 홀로 중풍치레하는 아버지를 보며 군소리를 섞어가며 ,
음식을 떠멕이고, 콧물 훌쩍거려가며 몸을 닦이고 했다
할배는 나날이 아이처럼 순해지고 아이처럼 똥오줌을 옷에다가 쌌다
고모는 그렇지 않아도 말이 나오던 당신 큰오빠의 재혼을 가파르게 추진했다
할배는 아무것도 모른채 누워서 새며느리 절을 받았고
소녀는 할배가 새며느리를 멍하게 바라보는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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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며느리는 조금 열린 방문 사이로 음식만 덜렁 밀어넣곤 나중에 그릇만 수거해갔다
소녀는 할배가 가련해서 분노가 치밀어왔다
할배도 더이상 당신 딸도 기다리지 않고 며느리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하루종일 기다리는 사람은 당신의 손녀였다
소녀도 그걸 아는지라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할배 부터 점검 했다
할배는 여기 저기 어질러논 배설물을 오그라든 손으로 가르키며
어서 처리하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 욱..욱.. \" 가느린 할배의 말은 유일한 하루의 이야기였다
할배는 굳어버린 다리를 최대한 움직여 내의를 갈아 입히는 손녀에게 협조를 할려 하지만
겨우 한쪽 움직이는 손만으로 사타구니만 애써 가릴뿐이었다
소녀는 할배의 가시 같은 다리를 보면서 우리 할배는 이제 낫지는 못할거란 어두운 생각이 들었다
할배가 못질을 하고 뭔가를 부지런히 만들때 그 옛날 할배는 작은 체구지만
대단한 장인이라고 느꼈는데 어느새 허물어진 육신은 가을 노지길 들풀 검불뎅이처럼 말라있었다
쌍겹진 그 큰 눈은 쳐져내리고 광대뼈 능선에선 시커먼 검버섯이 할배 눈동자 보다 커져 있었다

\" 할배.. 새엄마가 속이 안좋은건 뱃속에 우리 동생이 있어서 그런기라예.
고모도 자꾸 친정에 오는거 좋은기 아니라고 넘들이 그래삿는다 아입니까....
고모는 날마다 울어예.. \"
할배는 손녀에게 눈을 맟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내 할배를 괴롭히던 오물 투성이 옷가지를 씻으며 소녀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 옷들이 곧 재가 되어 다시는 할배가 입지 못하게 될거라는 망상스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배는 작은 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혀도 오그라든 할배의 목소리가 하루살이 풀벌레 소리보다 작게 들렸지만
소녀의 귀는 쫑긋 곧추세워져 놓치지 않았다
요밑을 가리켜 들쳐보니 돈이 몇닢 있었다
자꾸 갖고 가라면서 할배가 웃는것 같았다
소녀는 한동안 할배의 용돈에 신이나 나중엔 스스로 요밑을 들치기도 하였다
깊어질대로 깊은 늦가을.. 아니 초겨울..
할배가 사는 집 골목에 첫추위를 몰고온 삭풍은
할배와 할배의 요를 걷어가 버렸다
산에서 내려온 그날 ..
겨울 황혼이 단감처럼 번지던 해거름에
소녀의 가족들은 할배의 옷가지를 태웠다
할배의 회색 액스란 내복은 폴리에틸렌 소재라 너무 질겨서 재를 내리지 못하고
엉겨붙은 골탕처럼 흙속에서 겉돌았다
소녀는 그 엑스란 내복을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문질러왔는지
남은 내복의 생채기를 보니 할배의 슬픈 검버섯이 자꾸 생각났다.
고모와 아버지와 삼촌은 \" 아부지 좋은데 가이소 \" 하면서 곡을 하고 있었고
할배의 방에서는 보물섬에서 보물 나오듯 소녀의 용돈이 자꾸 나왔다
소녀의 아버지는 할배의 돈으로 당시 신고 싶었던 기차표 캐미칼 슈즈를 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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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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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와 할매는 이제 걸어서 제삿밥 드시러 오실것이다.
오십이 된 그 손녀는 이제사 몇십년만에 할배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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