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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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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시작)


BY 개망초꽃 2006-09-27

층층화단을 벗어난 만수국은 망초 꽃과 함께 보도블록 사이 잡초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자주색 과꽃이 한쪽으로 몰려 핀 일층 식당은 한가한 시골 마당을 그립게 했다.

그 건물 지하의 반은 주차장으로 쓰고 나머지 반을 나누고 쪼갠 교실엔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르치는 센터가

언제부터인지 자라를 잡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화단은 계단식이었는데

쓸만한 화초는 없고 만수국만 화단을 벗어나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다.


늦여름 어느 오후는 낯설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책상에 앉아 있던 교실은 도서실처럼 조용했다.

어느 학생의 기침 한번에 교실은 팔딱 깨어나고

교실 밖까지 벗어나는 선생님의 힘 있는 목소리에

굳어 있던 내 기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어느 여름날과

아카시나무랑 흡사하게 생긴 이름모를 가로수 잎이 노랗게 두런두런 떨어지던 9월의 초입과

단풍잎이 한쪽가지부터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어느 날을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얼룩무늬주황색 만수국이 핀 화단을 내려가며 한달을 보냈다.


내가 시작한 공부는 검정고시도 아니고 대학의 국문과도 아닌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따려고 오후 내내 교실에 앉아 있었야하는

그야말로 누구나 딸 수 있는 흔한 편에 속하는 자격증을

어쩌면 쓸모가 없을지도 모를 늦은 나이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우선은 공짜였다.

무엇보다 우선은 보조금도 나왔고 차비도 준다고 했다.

그 무엇보다 우선은 취업을 위해서지만

아무나 공짜는 아니고 나처럼 여성가장이라야만 공짜라고 했다.


혼자라는 것이 증명이 돼야하는 서류를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우리나라도 살기 버거운 사람들한테 참 많은 혜택을 주는구나, 고마웠다.

동사무소 직원들도

공짜로 자격증을 따게 해주는 고양인력개발센터 직원들도 친절하고 따스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나라가 되어가는구나, 고마웠다.


우리 반은 모두 13명의 여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담임선생님은 단발생머리 활달 명랑한 처녀 선생님이고,

공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잘생긴 총각선생님이다.


공부 시작 전에 이름을 불러 출석을 확인한다.

지각 세 번이면 결석 한번,

조퇴 세 번도 결석 한번,

세 번 결석을 하면 보조금이 안 나온다.

무단결석 일주일이면 퇴학을 시킨다.



50분 수업과 10분 쉬는 시간.

나는 교복을 입지 않은 여고시절도 다시 돌아갔다.

마음은 여고시절 연둣빛 사색의 계절이지만

얼굴은 단풍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 어느 날로 돌아와 있다.


우리는 선생님을 애타게 부른다.

더블클릭도 할 줄 모르는 학생과 새폴더를 만들 줄 모르는 내가 총각선생님을 닳도록 부른다.

“선생님?”

“선생님? 시작프로그램이 어디 있어요?”
“선생님? 글씨가 다 날아갔어요.”

“선생니이임~~~ 어디로 들어간다고요? 다시 설명해 주세요.”


선생님은 우리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네…….어머니”

“다시 설명해 드릴까요? 어머니”

“저번에 가르쳐 드렸잖아요. 어머니이~~~”

“어머나! 허걱! 벌써 잊어버리셨어요, 어머니.”

우리도 답답하고 선생님도 답답하고, 답답하고 답답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책장 넘기듯  한달이 펄럭펄럭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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