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언제나 가을은 갑자기 와서 갑자기 간다. 꼭 사랑같다.
사랑이 가을을 닮은 까닭일까.
젊은 날, 가을엔 언제나 사랑이 고팠다.
고프면서도 사랑을 제대로 해보질 못했다.
내게 사랑은 정말이지 지랄같았다.
그렇게 속되게 밖엔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나는 사랑할 능력이 부족했다.
너무 가벼웠고 너무 소홀했다.
한 사람이 있었다.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어렵게 공부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고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었다.
신뢰가 가는 얼굴에 성실함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잘 생긴 호남이었고 키도 큰 멋진 사람이었다.
사랑엔 내가 먼저였다.
그 사람은 여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그는 평생 그대로 있을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름대로 자존심 내세우는 여자로서 어찌 먼저 손 내밀겠는가.
난생 처음으로 호감을 나타내는 고백 비슷한 것을 슬쩍 비추었다.
역시 그답게 수줍어했다.
그러면서도 홍조 가득한 얼굴로 더듬더듬 내 마음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그는 나를 서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사준 책이 어린 왕자였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렇게 한나절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 내 사랑은 사라졌다.
사랑의 유통기간은 몹시도 짧았다.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그는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황당했을 것이다.
좋아하던 여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설레였는데 그리곤 바로 헤어짐이라니 참 기가 막힌 일이었을 것이다.
어쩜 기분 나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내 맘을 몰랐다.
갑자기 그에게서 돌아선 내 맘을 몰랐다.
훌륭한 사람으로 보였고 그의 삶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한 순간 이런 감정을 느낀 것 같기는 하다.
그의 뒷모습이 몹시도 고단해 보였던 것.
그의 어깨가 아주 지쳐 보였던 것.
나만 그를 향해 있다가 막상 그가 나를 향하자 아직은 그에 비해 제법 어렸던 나는 그의 짊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버럭 겁이 났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이유였을까. 사실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었다면 나는 더 나쁜 여자이다.
나도 내가 싫었다.
사랑을 갖고 장난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좋아한 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열병처럼 그를 생각한 시간들도 모두 진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 감정들이 식어버린 것이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어찌 이리 사랑에 가벼울 수가 있는지 아니, 감히 그 감정에 사랑이라 말할 처지도 못될 것이다.
그래도 내 맘이 내 맘대로 되질 않는 것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얼마 후 다행히 그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여전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그렇게 한 사랑이 갔다.
그 뒤로도 때때로 사랑 같은 감정으로 만남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매번 마찬가지였다.
내게 사랑은 허깨비였다.
술자리에서 내게 보낸 눈빛이 좀 징그럽게 보였다는 이유로,
내 손을 덥썩 잡았다는 이유로,
나 아니면 안된다고 집착했다는 이유로 나는 사람들을 보냈다.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7시에 전화하겠습니다. 하면 정각 7시에 전화하는 사람.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긴 했다.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질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한테만 목숨 거나, 왜 이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이 남자는 반대였다. 7시가 다가오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1분이라도 전화가 늦어지면 신경이 곤두섰다.
누가 나한테 그러면 난 질렸었는데 이번엔 내가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
전화가 오면 고마웠다.
정각에 하면 정말 확실한 사람이구나 더 좋아졌다.
손을 만져도 그리고 후일 입맞춤을 해도 기분 좋은 떨림이 있을 뿐, 전혀 밀쳐지지 않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나는 그와 결혼했다.
여전히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뜨거울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저 담담하게 나를 사랑했고 착실하게 내 사랑을 받아줄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 같은 사랑 한번 해 봤냐고 묻는다면 난 어떤 답을 하게 될까.
왠지 남편과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뜨거운 사랑과는 달라보인다.
서로가 죽도록 원하는 사랑.
너 아니면 절대 안되는 사랑.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랑을 주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가끔 사랑이 그리워진다.
어떤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사람이 아닌, 사랑 그 자체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 평생 껴안고 갈만한 사랑이 없음에 나는 가난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지금의 나는 구체적인 사랑에 관해선 완전 불감증이 되었다는 것이다 .
때론 불륜을 저지르면서까지 사랑에 올인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물론 불륜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난 그 사람들을 함부로 손가락질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열이 없기에 절제 운운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다.
내게 아직 뜨거움이 남아 있고 그런 상태에서 근사한 대상이 다가온다면 사실 어지간해서는 그것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도덕의 힘이 사랑을 쉬이 이길 수 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고선 확언할 수가 없다.
사랑을 절제해야 하는 고통 속에 있는 이가 차라리 부러울 만큼 내게 사랑은 이제 멀고 먼 전설 속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지.
살아내느라 너무 바쁜 이 가을, 아주 오랜만에 잠시 싱숭생숭한 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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