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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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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미운정이 무섭다더니


BY 동그라미 2006-09-05

 

미운정이 더 무섭다더니




사람을 죽였다. 30년 동안 엄마를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했던 나의 아버지를 어젯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죽이고 말았다. 엄마는 울지 않았다. 나도 울지 않았다. 죽어 있는 아버지도 울지 않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침묵 끝에 나는 내 손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곧 감옥으로 갔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도 울지 않았다. 어쩌면 죽은 아버지만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후회의 눈물? 아니면 자식이 부모를 죽인 억울한 눈물? 나의 아버지란 사람은 죽어서도 자신이 살면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처음엔 엄마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다. 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산다는 엄마, 자식만 없었다면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어디론가 도망가서 살고 싶었다던 엄마, 아버지를 만난 그 순간부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엄마가 불쌍해서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있던 썩어가던 끈을 내가 대신 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 나는 아버지를 죽였다. 저런 아버지의 딸로 사는 것 자체가 나또한 지옥 같은 삶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딸로 사느니 차라리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서 평생 썩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모든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던 불쌍한 사람이었다.


감옥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겨울날의 감옥 마룻바닥은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차갑고 목구멍 속까지 고드름이 생겨날 정도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점점 사라져가고 나는 아버지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30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했던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해방시키고 내가 해방되던 그날부터 살면서 한번도 웃지 않고 살았던 내가 비로소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만 말이다.


  언제인지 기억은 없지만 사춘기 시절 내 속의 제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가 밉다면서 눈물을 흘리던 제이를 위해 나는 이런 글을 썼던 것 같다. 가족을 늘 불행한 존재로 만들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게 했던 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나도 제이도 엄마도 모두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아버지를 소설 속에서 죽였던 것이다. 바꿀 수만 있다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내 소설 속의 아버지를 현실 속의 아버지와 바꾸어 엄마 곁에 두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부자 아버지가 아니었다. 가난해도 가족을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존경할 수 있는 따뜻한 아버지, 안기고 싶은 그런 아버지가 내겐 필요 했었다.


  어린시절 가난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늘 혼자였다. 학교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고 다니고 멋진 가방을 들고 다니는 부자 친구, 공부는 못해도 운동을 잘하거나 성격이 좋아서 늘 우르르 몰려다니는 즐거운 친구가 많았지만 내 곁에는 그런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친구들은 나처럼 소극적이고 재미없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런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어야하는 수업시간이면 오히려 내가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했다. 차라리 혼자인 게 편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서 지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왕 따’였을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왕 따를 자청한 왕 따 말이다. 하지만 내 속의 나는 매우 적극적인 여자아이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때론 너무나 섬뜩 할 정도로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내 속의 나에게 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지냈다. 제이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왜 슬픈지 다 알아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책을 선물 받았는데 나와 제이는 그 책을 읽고 엉엉 울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좋아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제이와 함께 우울한 사춘기시절의 어둔 터널을 함께 빠져나왔다.


-넌, 꿈이 뭐야?


  제이는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내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 생각해 본적 없어......


  제이는 내게 글 쓰는 사람이 되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나 같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을 흘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내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현실 속의 아버지는 나를 항상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내 소설 속의 아버지는 나를 항상 행복하게 만들어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속상하거나 하면 글을 쓰면서 현실 속의 나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위로하곤 한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법이었다.


  아버지는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사람이 배가 고파서 죽는 시절이었고 죽도 제대로 끓여 먹기 힘들었던 시절 아버지는 유난히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사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성격도 이상했고 고집도 강해서 어지간해서는 식구들이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베푸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밑으로 줄줄이 동생 여섯이 생기면서는 교육도 받지 못해서 먹고 살기 바쁜 나머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를 포기해버린 상태였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조차 배울 겨를도 없이 커 버린 아버지.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며 찬밥 신세로 전략해 집안의 골치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전쟁터로 갔을까? 돈을 많이 벌어서 식구들에게 대접을 받아보겠다는 욕심?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아버지는 그 위험한 전쟁 통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평생 만져보기 힘든 돈을 나라에서 보상받았지만 목숨을 단보로 받은 그 돈을 아버지는 놀음으로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더더욱 아버지를 미워했고 보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결국 아버지는 집에서 내 놓은 자식이 되고 동생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면서 아버지는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았다. 전쟁 탓일까? 아버지는 인생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아무도 아버지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할머니의 최대 고민은 그런 아버지를 빨리 결혼 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결혼만 하면 그런 아버지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아버지가 사랑을 못 받고 자란 탓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아버지의 운명 이었을까.


  그런 아버지를 바보온달로 착각한 불쌍한 평강공주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엄마였다. 그 당시 학교선생님까지 하셨다는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다는 엄마를 아버지의 무엇을 보고 엄마와 결혼하게 하셨던 것일까? 결국 그런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의 인생은 꼬일 데로 꼬인 실타래처럼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속아서 결혼 한 엄마는 죽네 사네 하면서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았다. 잠깐이었지만 행복했던 순간이었을까? 아버지의 어린시절부터 이어져온 나쁜 습관은 결혼 후에도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부모와 동생들에게 의지했던 이기적인 행동이 이제는 아내와 자기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사실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 아버지는 지금도 그냥 살아가고 있다. 큰오빠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지금도 그런 아버지와 얘기라도 하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만큼 오빠들도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더 이상 아버지와 가까워지지 않기 때문 일것이다.


  다른 집 부모는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에게 풀려고 한다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달랐다. 자신이 배우지 못했으니 너희들도 배우지 말라는 식으로 툭하면 고아원에 쳐 넣는다는 둥 쓸데없이 배워서 어디에 써 먹느냐는 둥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로 아버지는 자식들의 가슴에 커다란 못을 박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오빠들과 나에겐 그런 아버지 때문에 늘 마음 한구석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 빈자리를 엄마는 아무런 말없이 대신해주셨고 우리들은 엄마의 사랑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큰 오빠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떠났을 것이라던 불쌍한 평강공주 엄마. 아버지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의 불쌍한 자식들을 위해서 엄마는 안 해 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사글세도 겨우 내며 단칸방 신세를 모면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는데 그 사글세 낼 돈 마저 아버지는 엄마에게서 빼앗아 놀음으로 날려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울면서 죽지 않고서는 고쳐지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자식이 둘인지 셋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자식이 커 있네, 하고 웃어버리는 뻔뻔한 아버지였다.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그 단칸방에서 아버지와 엄마는 매일매일 싸웠다. 아버지는 엄마가 벌어 온 돈을 빼앗기 위해서 엄마는 자식들 가리키며 먹고 살기 위해서 싸웠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보았지만 듣지 않으려 해도 아버지의 쌍스러운 욕설은 하나하나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고 고스라니 닦아 내도 닦아 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내게 남게 했다.


  -아빠가 우리 딸 시집가는 거 보고 죽으려면 60살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추운 겨울날 집 앞 골목을 걸으면서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이었고 아버지 나이는 마흔 일곱이었다. 아무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아버지였지만 끊을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인지라 보기 싫어도 보고 살았고 말하기 싫어도 말해야 하는 나의 아버지였다. 불쌍한 엄마 때문에 말이다.


  -60살? 너무 많아. 아빠는 딱 50살 까지만 살아. 그때까지는 참아줄게. 그리고 죽더라도 아빠 묘 자리 살 돈은 벌어 놓고 죽어.


  어느새 나는 내 속의 제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기적인 아버지로부터 살아남는 길은 내가 제이가 되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나는 커가면서 내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버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온 아버지도 이제 늙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젊은 시절 가족에게 했던 기억은 당신 마음대로 모두 지워버리고 당신이 아버지로서 가끔 아주 가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던 기억만 갖고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혹 아버지가 옛날에 그랬잖아요,라고 말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뻔뻔하기만 한 아버지. 나에게 단 한번도 따뜻한 아버지 노릇을 해 준 적이 없던 아버지에게 나 또한 따뜻한 딸이 되어주고 싶지 않았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난 그때 아버지가 50살이 되면 죽어주길 바랬다. 엄마 곁에서 떠나주길 바랬다. 아버지에 대한 즐거운 추억도 어떤 미련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더 빨리 죽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싫었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뉴스에서는 이런 저런 사고로 많이들 죽었지만 아버지는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운전을 못하니깐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도 없었고, 등산도 좋아하지 않아서 옆집 아저씨처럼 등산을 하다가 추락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몸에 좋지 않다는 담배나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고,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아이고, 아이고 노래를 부르며 그 길로 약국에 가서 얼른 약을 지어 먹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은 불가사의한 아버지였으니깐 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직업 한번 가져본 적 없던 아버지가 차라리 도둑질을 해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릴 줄 아는 사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딱 한번만이라도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벌어들인 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 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할 줄 아는 건 쌍스러운 욕밖에 없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전가하는 불평불만 덩어리였다. 그나마 막노동을 해서 어렵게 번 돈 마저도 놀음판에서 다 날려 버리고 마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태어나기를 잘 못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화가 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옛날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각나 지금도 가끔씩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탁탁 내 뱉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억장이 무너지고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 말도 하기 싫지만 혹 대화를 나누게 되면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엄마였다. 바보 같은 평강공주 엄마 말이다. 35년을 동화 속의 바보온달처럼 고쳐보겠다고 살아온 평강공주. 정말 법만 없다면 소설의 속의 내가 되어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리 배우지 않았어도 아무리 무능해도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해도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껴안는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자기 아내와 자기 자식도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어쩜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지. 아버지의 아내가 된 엄마도 불쌍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자식인 우리도 불쌍하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도 불쌍하다.


  불쌍한 아버지! 아버지로 인해 온 가족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다.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을 마진 게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아버지가 혹 사고를 당해서 정말 죽는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젠 세월이 흘러 나와 함께 서른 살이 넘은 제이는 오래전 적극적이고 섬뜩한 생각을 하는 여자가 아니다. 이젠 내게 삶과 타협하며 사는 법을 함께 고민해주며 불쌍한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신은 그런 불쌍한 아버지를 위해서 엄마와 나를 그리고 오빠들을 아버지에게 보내 주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일은 여행을 떠난다. 아버지의 환갑 여행 말이다. 50살까지만 살라고 했던 아버지가 벌써 환갑이 되신 것이다. 그렇게 미워라 미워라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아버지는 지금도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더니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요즘 시대에는 환갑잔치 대신 가족여행이 유행이다. 요즘 들어 가족끼리 여행 한번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셨던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걸려 유행 따라 우리도 아버지와 함께 환갑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미워하는 아버지의 환갑여행을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아버지와 태어나서 처음 떠나는 여행. 그렇게 죽어라, 죽어라 기도를 할 땐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가 왠지 이번 환갑 때 가족 끼리 여행을 가지 않으면 다시는 가족 끼리 여행을 못 갈 것 같다. 그런 생각 끝에 절대로 흘리지 않겠다던 눈물이 내 눈에서 주책없이 흘러내렸다. 그냥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이래서 가족인가 보다. 그런 아버지라도 건강하게 살아계셔 주셔서 감사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몸이 허약한 엄마 곁에 살아있어 주셔서 감사하다. 여기저기 아파서 잠 못 이루는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파스를 등에 붙여 주는 일이다. 이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버지가 엄마 곁에서 오래오래 살아 주셨으면 좋겠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버지는 장애인이다.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이기적인 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 말이다. 아버지가 원해서 생긴 병은 아니다. 자라온 환경이 그러다 보니 이젠 그 병을 고칠 수는 없지만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로 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누군가에게 사랑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인정 한번 받아 보지 못한 불쌍한 아버지를 내가 먼저 마음속에서 이해하기로 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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