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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다 교수의 정체


BY 불토끼 2006-08-26



오늘밤, 바로 한 시간 전에 나는 후자다 교수를 우연히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술이 한 잔 돼서 밤 10시에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빽빽한 지하철 내에서도 빈자리가 있길래 덥석 그 자리에 앉았는데
어렵쇼 바로 내 앞에 후자다 교수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양반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다.

이 사람과 나는 통성명을 한 적은 없지만
한때 같은 시간에 등하교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전. 당시 나는 어떤 시험을 준비하기위해
아침일찍 도서관에 도착해 하루종일 공부하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후자다 교수 역시 아침일찍 집을 나와 대학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우리는 도서관에서, 지하철에서, 학생식당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얼굴을 마주쳤다.


그는 150센티가 될까말까한 작달막한 키에
배가 약간 튀어나온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동양인이다.

50대 초반정도. 동남아시아 사람같지만 남아메리카 인디언일 가능성도 있다.
어디서 만나나 그는 늘 엄숙한 표정이었다.
웃는 걸 본 적이 없고 아는 사람과 얘기하는걸 본 적도 없다.
책이나 신문을 읽고있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엄숙한 인상을 하고 그 인상과 어울리게
늘 검은색 색안경을 끼고 다녔다.

밤 10시 지하철 안에서 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검정색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다녔는데
그 정장이란 것이 촌어르신들이 1년에 두어 번 남의 잔치에 가느라 행차할 때 입는
후줄근한 정장이었다.

그런 정장에 어울리게 늘 손에 들고 다니는 건
검은색 가죽 비지니스 가방과 수퍼마켓에서 50원에 파는 비닐봉다리.
 교수라는 신분에 걸맞게 그 가죽가방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이 가득했다.



내가 그를 안지는 4년이 됐지만
남편말로는 자기가 대학에 입학할때부터 그를 학교에서 봐왔으니
그는 최소 10년이 넘게 대학엘 다니는 것이었고
우리 시어머니에 따르면 그가 대학에 출현한 지는 10년이 아니라
기억에도 가물거릴 정도로 오래됐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지하철 안에서 후자다 교수를 만나면서
그가 후자다씨라는 것과 교수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입은 까만색 양복깃에 ‘후자다 교수’하고
흰 종이에 컴퓨터로 적은 명찰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명찰로 말하자면(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가 교수로서 무슨 세미나에 참석하고난 이후 떼는 것을 잊어버려
거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고의성이 짙은 명찰같아 보였다.

‘Prof. Husada’라고 적힌 밑으로 일본말도 아닌,
그렇다고 태국말이나 인도말도 아닌 손으로 적은 이상한 글자들이 적혀있었는데
그 문자가 실제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자기의 직함과 성명을 의미하는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교수라는 명찰을 달고 다닐지라도
나는 후자다씨가 교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뿐만아니라 그 대학에 다니는 사람중 누구도
그를 교수라고 생각하지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가 강의하거나 듣기위해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늘 비닐봉다리와 무거운 가죽가방을 들고다니며
교수연구실 대신 시민들에게도 개방되는 대학도서관에 앉아 있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빛좋은 여름이면 대학캠퍼스에서 낮잠을 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볼때마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그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멀어졌던 그가
오늘은 교수라는 명찰을 달고 내 앞에 나타났으니 더더욱.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는 젊은 날에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영영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대학근처를 맴도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교수가 되려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정말 교수노릇을 하고있을 수도 있다.

발상을 전환해 생각해보자면
그는 어쩌면 피터팬교의 교인이거나 교주로서
그 색안경을 끼고 다니며 멀쩡한 사람들을 농락하고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우리는 목적지인 긴뿔시장에 도착했다.

후자다 교수와 나는 함께 긴뿔시장역에 내렸다.
나는 후자다씨를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역사를 빠져나가지 않고
꽃집 앞에 서서 바나나 나무를 관찰하는 척 하고 그를 기다렸다.

무릎이 안좋은지 계단이 아닌 엘리베이터로 지하철계단을 올라온 그는
느린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10초 증명사진부스 앞에 가방과 비닐봉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울앞에 서서 양복주머니에서
살이 촘촘히 박힌 파란빗을 꺼내더니
반이나 벗겨진 그의 곱슬머리를 곱게 빗었다.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본 그는 다시 가방을 들고 역사를 빠져나갔다.


그는 지하철역을 나와 곧장 걸어나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 한 100미터쯤 걸어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이 짓거리가
너무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이 시각에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그러고 좀 서있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10분내로 집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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