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나는 흐느끼다 못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편은 귀찮은듯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 자 - 아 응, 자\' 하며 달래고 있다. 나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꿈을 꾼것이다. 꿈에서 내 잘못도 아닌데, 모두들 내게 핀잔을 주고 오히려 사과 받아야 하는 나는 잠에서 깨고 나서도 억울함을 참지 못해 울기 시작한것이다. \" 그치! 내가 잘못한거 아니지 그치\" \'그래 그래 그만자 응\' 남편이 무심결에 내가 맡다고 인정해준 \"그래\" 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어깨를 들썩 이면서도 다시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머리에서 어젯밤 꿈이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누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부당한 대우라, 그건 아마 내가 우울증으로 정신과까지 찾기전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삼십년도 더된 내가 계집아이로 태어난 날 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1남 삼녀의 별볼일 없는 둘째였다. 특별하게 이쁜것도 애교가 있던것도 아니였던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우등상을 주시길래 정말 놀랐다. 아 선생님이 날 알고 있었구나 하고...
내 꿈은 화가 였다. 미술학원에 다닌적도 없고 형편이 좋은것도 아니였지만 난 중학교 때부터 유화를 그렸고, 고등학교 졸업 할때까지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았었다. 순전히 미술선생님의 지도하에 도대회까지 나가기도 했다. 미술대회일정이 잡히면 학교에서 물감과 캔버스를 사주셨고, 미대를 가기위해 대회에 나온 애들을 젖히고 상을 받아왔다. 특히 저녁놀이 질때의그 보랏빛 하늘과 어둑해진 나무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였다.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시어머니셨다. 내가 가장 견딜수 없던건 시이모들과 한편이되어 내이야기는 듣지도 않으시고, 시어머니가 생각하신대로 판단해서 더 일을 크게 확대 시키는 것이였다.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식음을 전패하고 누우신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려면 죄인처럼 빌고 또 빌어야했다. 난 잘못한게 없어도 제발 진지라도 드시라고 빌어야했다.
형편이 좀 나았어도 미대에 보내지 않았을것이다. 그건 내 꿈과 상관없이 난 딸년으로 태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멀리 온것같다. 그러기엔 애들의 학원비 내기도 빠듯하고 큰며느리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다만 애들이 무엇을 꿈꾸더라도 그꿈을 위해 도와 주는 부모가 되는게 내 새로운 꿈이다. 그리고, 영원히 적수로 살수없는 시어머니가 나를 인정해 주는날 그날이 오는게 또 다른 나의꿈이다.
나는 병원문을 나서면서 오늘은 악몽을꾸지 않아도 잘수있어서 다행이라고 위로해본다. 정신과 약이란게 신통하게도 악몽없이 잠을 잘수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안에서 본 저녁노을은 온통 붉은 빛으로 내 소녀시절 화가를 꿈꿀때 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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