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붙잡고 차나 한잔 하자며 수작이라도 부려야 할 것처럼 뜨거운 날 광안리로 향했다. 여름바다는 축제가 한창이다. 끓어오르는 젊음은 시원한 맥주의 거품처럼 모래밭 위 군데군데서 흘러넘친다. 차가운 맥주병을 딸 때 \'팡!\'하고 터져 나오는 소리처럼 내 몸 속에 갇혀있던 소리들이 목을 타고 아우성이다.
그때 아이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작고 마르고 유난히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어 까만 눈만 반짝여 보였던 아이. 고집이 세고 말수가 적어 가끔씩 애어른이라는 소리를 듣던 날 들이었다.
복숭아꽃이 이울고 꽃 진자리에 복숭아가 맺히던 날이었다. 뒷집의 또래 동무 계집아이와 복숭아 과수원의 나무에 맺히기 시작하던 애기 복숭아를 죄다 따기 시작했다. 꽃이 지고복숭아 모양으로 맺기 시작한 그 작은 복숭을 따서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아이들의 복숭아 따기 놓이는 사흘 만에 어른들에게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주인집 아이의 아버지는 대처승이었다. 집의 위채엔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는데 둘은 따다 모은 복숭아들은 법당 아래 노란 휘장 속에 숨겨 놓았는데 친구의 엄마에게 들켜버린 것이었다.
점심을 드시러 오신 아버지 곁에서 막 수저를 들려던 어머니가 주인집여자의 손짓에 불러 나가셨다. 얼마 후 돌아오신 엄마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아버지가 점심을 드시고 나가시자 엄마는 아이에게 매를 드셨다. 왜 애기 복숭을 땄느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엄마의 화를 돋우었고 먹지 않고 법당에 숨겨 두었다고 항변하며 대 들어서 엄마의 더 큰 노여움을 샀다. 매를 맞으며 복숭아를 딴 게 잘못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엄마가 회초리를 더 높이 들었을 때도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잘 못했니 안 했니’를 수없이 엄마가 되물으며 면죄부의 구실을 주려 했지만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아이의 고집에 두 손을 다 들어버린 엄마는 마당에 가만히 서 있으라는 벌을 주셨다. 가끔 곁을 지나시며 ‘그래도 잘못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항복의 기회를 주셨지만 아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그렇게 혼나고 있는 순간 뒷집 친구는 대문 틈 사이로 아이의 야단맞는 꼴을 훔쳐보고 있었다. 친구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먼저 애기 복숭을 따자고 한 것도 법당에 숨겨두자고 한 것도 친구였는데 왜 엄마는 나만 혼내는 건지 아이는 골이 잔뜩 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아래 가만히 서 있는 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대문간의 친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이없게도 피식 웃음이 났는데 그걸 하필 엄마가 보시고 말았다. ‘벌서는 놈이 어디 웃고 있느냐’며 화가 더 나신 엄마가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오시더니 아이에게 끼얹으셨다. 순간 앞이 캄캄해지며 제 자리에서 휘청거리던 아이를 향해 두 번째 물바가지를 가져오시는 엄마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
“난 저수지에 빠져 죽어 버릴 거야.”
아이의 반격에 어이없어하는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의림지까지의 거리는 어른의 걸음으로도 20분도 좋게 거리는 거리라는 걸 안 것은 몇 해 전 다시 제천을 찾아서였다.
설마 저것이 정말 저수지에 빠질까 하던 엄마는 아이의 뒤통수가 저만큼 멀어지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랴부랴 뒤를 따라 오시던 엄마는 저수지가 가까울수록 조금씩 늦어지는 아이의 걸음에 안도하며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하셨다. 엄마가 잠시 방심하던 순간 저수지 둑에서 잠시 주춤하던 아이는 보라는 듯이 물속으로 자맥질을 하고 말았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엄마는 혼비백산해서 둑으로 달려갔고 몇 번이나 물속과 물위를 솟구쳐 오르던 아이의 발하나를 엄마는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아이를 물가로 데려 나오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오글오글 물 끓는 소리만 요란하더란다. 아이는 며칠 동안 고열과 헛소리를 하며 않다가 깨어났다.
왜 그때 그렇게 나만 혼냈었느냐고 훗날 아이는 엄마에게 물었다.
아이가 살던 집의 주인은 친구네 엄마였단다. 세 들어 살면서 그런 일이 생겼었는데 주인집 여자는 자기 딸을 꼬드겨 그런 거라고 화를 냈었기에 엄마는 주인집 여자가 보라고 더 아이에게 혼을 낸 것이라며 덧붙여서 말을 했다. 원래 첫아이는 잘 키워 보려고 더 혼도 많이 내고 하는 거란다. 하나 둘 아이가 늘고 엄마도 나이가 들면서 엄마들은 조금씩 지치고 포기하게 되는 거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둘째 셋째 내려 갈수록 영악해지고 엄마들은 무뎌지는 거란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고집이 센 거냐.
저수지사건 이후 어른이 된 아이는 물이 종아리만 넘어도 두려움에 진저리를 친다. 심지어 목욕탕 타일에 비쳐 푸르게 보이는 냉탕의 물조차도 두려워하면서도 저수지의 그 깊고 음습한 물의 빛깔인 파랑색을 자주 이야기 한다. 산그늘이 저수지에 내려앉고 파란 물빛이 검게 보이면 현기증으로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파랑을 느끼려고 영화 블루를 3번이나 보았다. 어찌어찌하여 어른이 되었으나 영화 속의 줄리엣 비노쉬처럼 이러저러한 구속에서 벗어나 푸른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그게 문제이다.
저기 멀리 수평선은 맞닿은 하늘과 길고긴 입맞춤을 하고 해변에서 바다는 파란 물과 포옹을 한다. 날마다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는 파란색. 자유로운 파랑, 이성적인 파랑, 파랑은 차갑다 혹은 깊은 색이다. 무엇에도 구속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열정으로 깊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색이다. 혼자 보는 바다의 파란색은 여전히 서늘하고 쓸쓸하고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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