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사는 언니에게서 엄마가 위독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노라는 연락이 왔다. 친정에 뭔 일이 있는지 엄마의 근황이 어떠하신지 도통 친정일엔 관심도 가지지 못하고 살아 온 나.. 항상 먼 사람인양 아주 따급한 상황이 되어서나 연락을 받는구나., 이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엄마가 위독하시다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두 아이를 걸려서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며 백병원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오랜만에 만나보는 언니가 병원복도에서 마중을 한다. 언제 보아도 늘 그대로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보였던 엄마는 병원복을 입어서인지 늙은 환자의 궁색한 몰골이 완연하다. 심장에 이상이 와서 수술을 받으셔야 된단다. 어느새 이렇게 늙었는지..누워있는 엄마가 딱하다는 마음에 목이 메인다. 첨으로 병원복을 입고 누워있는 엄마가 맘이 아파서 소리도 못내고 뚝뚝 눈물만 흘렸다. 이와중에도 애들 데리고 어떻게 왔냐고 걱정하는 엄마.. 아이들이 신경 쓰였는지 어여 밖으로들 나가서 쉬라고들 하신다. 언니가 밥을 싸 왔으니 먹을라냔다. 애들 끌려서 차 타고 오느라 지치기도 한데다 엄마의 몰골을 보니 점심생각은 없었지만 병간하는 올케와, 언니와 함께 먹고싶어 밥 보따리를 풀자고 했다. 여자들 셋이서 비상계단에 쭈그리고 않잤다. 엄마를 닮아서 살림과 음식하는데만 선수인 작은언니는 이번에도 엄마를 돌보는 오빠내외와 조카들이 신경쓰였을것이다. 동태전 장조림 멸치볶음 나물반찬등 이것저것 타파통이 몇개,, 열무김치 알타리김치가 큰통으로 두개. 수원에서 을지로까지 차 트렁크에 그득하게 싫고 왔구나.. 언니가 있어서 때로는 친정올케들에게 낮이 서기도 한다. 굵직굵직하게 버무린 시골스런 열무김치가 새금새금 하니 맛있다. 엄마는 병원에 계신지 스므날만에 퇴원을 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말썽쟁이 두애들을 데리고 오고가기가 수월치 못하다는 핑계로 두번뿐이 문병도 못 가 뵈었는데, 어쨋든 수술도 잘되서 퇴원하셨다니 다행이다.오빠내외가 감사할따름밖에.. 큰언니 작은언니 오빠네 남동생 사남매가 각각 1백만원씩 합쳐서 병원빌 하고 약값으로 댔단다.나는 거기서 제외 됐으니 집에서 안정하시는동안 보약이나 지어 드릴마음으로 남편과 두 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수술이 잘 되서 집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안정을 찾고 계시는줄 알았던 엄마는 병원에 계실때보다 상태가 더 악화되신게 아닌가.. 몸이 뚱뚱 부운게.,어째 동생과 언니들 눈치가 이상하다. 미움도 삼키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엄마를 보니 이게 다 막내딸인 내 잘못인것 같아 가슴이 미여져 온다. 그동안 얼마나 가슴앓이를 하셨으면.. 심장에 수술까지 했을까.. 막 초급공무원인 오빠는 근무지가 청화대여서 시에서 공급하는 소형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었다. 방두개 거실하나,, 엄마는 미닫이 문이 달린 거실방에 누워계셨는데 오빠네 아이들 둘과 작은언니와 조카 그리고 우리 부부 애들.. 유아원을 방불케 하는 시끄러운 집.. 도저히 환자가 누워있을 자리가 안되는거 같다. 표현은 안하지만 간병하는 올케언니도 손님치르랴 간병하랴 좁은집에서 얼마나 고 되고 답답하겠는가. 아 내가 엄마를 모실만한 여껀이 되는 딸이라면... 마음이 착찹하다. 이렇게 한가로히 않자서 질질 눈물만 짜고 있을게 아니라, 애들을 집에다 데려다 놓고 다시와서 당분간은 간병하는데만 최선을 다 해보리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파서 고통스러워 하시는 엄마를 어떻게든 정성을 다하여 호전시켜 드려야겠단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친정엄닌 좀 어떠시냐고 궁금해 하시는 어머니께 많이 위독하시다고 말씀드렸다. 그말을 전 하는데도 어찌나 메이는지., 애들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는데 엄마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가슴을 도려내는듯한 아픈 울음을 울었다. 친정엄마의 몹시 않좋으시다는 말씀을 전해 들으신 어머니는 큰일이구나.. 좀전에 분명히 말씀으론 안타까워 하셨는데 화장실서 나오는 며느리의 눈 거죽이 벌건하니 친정엄니 일로 애타 하는 모습에 또 부화가 나셨나보다. \"속이 뒤집어진다 어쩐다\" 시며 저녁하는 등 뒤에서 아들과 마주안자 연신 줄 담배만 피워 대신다. 어머닌 그러시더라도 아이들을 집에 두고 다시 얼른 친정엄마께 가봐야겠단 마음에 다음날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어머니 방문을 여니 어머니 방은 텅 비어있었다. 전에도 기일때 생신때 일년에 한두번 친정에 다녀 온 날이면 애맨한 일로 아들내외를 달달 볶아대셨던 어머니는 친정엄마가 편찮다는 이유로 손주들 마끼고 친정에 뻔질나게 드나들것이란 느낌을 받으셨는지 온다간단 말씀도 없이 새벽같이 시골 딸 집으로 가버리신것이다. 그후 일주일만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애들에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시골고모네 가신 할머니 올라오실때까지 얌전하게 집 잘보고 있으라 하고, 택시로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엄마가 안치되셨다는 상계 백병원까지 가는데 어찌나 시간이 길고 설움이 복바치는지.. 숨소리도 안들리는 조용히 적막만 흐르는 차안에 뚝뚝뚝 줄기차게 흐르는 눈물 소리만 들리는것 같았다. 영안실에 도착하니 영정은 이미 차려져 있고 큰언니와 오빠가 영정을 지키고 있다. 검은태 사진곽 안의 얌전하게 바라보시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소리도 못내고 혼자 흘리기만 했던 눈물을 터질세라 맘껏 소리를 내여 크게 엉엉 울어댔다. 울음소리가 병원 건물이 통째로 떠라가랄듯 크게 울어댔다. 삼일장을 치르고, 집 걱정이 되어 평생을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힌색 한복을 입은채 오빠언니들에게 삼오제날 다시 간다 하고 집으로 왔다. 피곤과 녹초가 된 몸으로 현관에 들어서니 두애들이 뛰어나와 엄마 하고 달개여 든다. 어머닌 이제오나 그제오나 기다리고 계셨는지 상복을 입고 들어서는 아들내외를 보시자마자 잠깐 들어오지 말고 게 있으라 시더니 다급하게 주방으로 뛰가신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씀에 현관에서 신발도 못 벗고 머뭇머뭇 서 으니 어머닌 소금바가지에 소금을 담아 들고나와 훠이훠이 하시며 우리의 머리와 얼굴에 대고 굵직한 소금을 시원스레 뿌려 대신다. 멋 적은지 옆에서 피식하고 웃는 남편.. 소금뿌리기를 끝내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애썻다..며 위로의 말씀을 전하신다. 나는 처음으로 받아보는 어머니의 외로말씀에 울컥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못하고 괞찬아요 라는 표정으로 인사하곤 힘 없이 방으로 들어오는데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 \"올해 삼재가 끼어 걱정했는디 인제 다 지나 갔구먼..\" 세상에나..우리어머닌 지금 장모상을 치르고 온 아들에게 뭐라신겐가?? 논양반의 뜻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잘 알아들으려 해도, 삼재해에 혹시라도 당신에게 좋지 않은일이 생기는거 아닌가 우려했는데 미리 장모가 돌아가셨으니 그덕에 액땜을 해 다행이다라고 안도하는 뜻으로밖에 들리질 않는다. 어두우신 자기어머니껜 무던하기만 하던 남편도 그순간은 좀 피하기가 민망했는지 거실로 되 나가더니 어머니 귀에대고 \"엄마는 제 발 좀 가만히 좀 계셔요 그냥~~\" 라고 약간의 신경질이 섞인 말대꾸를 한다. 남편이 변명하듯 그랬더라도 어머님의 그말씀은 두고두고 잊혀지질 않을만큼 불쾌하다. 방으로 들어와 상복을 벗는데 이집에 살고있는 내자신이 너무도 기막히다는 슬픔에 또 복바친다. 행여라도 어머님이 눈치채실까 이불 뒤집어 쓰고 수리죽여 울었지만 아마도 평생토록 흘릴 눈물을 어머니 돌아가신 동안에 다 쏱았으리라.. * 어머니 돌아가신지도 어느새 17.8년이 되었습니다. (년도는 대충..기억으로.. 정확히 기억이 안나니 저 나쁜딸이 확실한것 같아요) 엄마가 (시어머님과 구분하려는 뜻에서 친정어머니를 엄마라 썻습니다.) 돌아가셨을땐 불효한것이 그리도 후회가 되었는데 또 막상 살다보니 제사때도 꼬박꼬박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녀가 되었네요. 여러분들은 저와같은 미련한 여인은 되지 마셔요. ㅎㅎ (죄송..) 오늘도 긴 글 보아주신 님들 고맙습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