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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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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했던 나의 20대


BY 불토끼 2006-07-10

올 여름휴가를 폴란드에서 보내기로 하고
폴란드에 대한 책자를 잔뜩 빌려왔는데
남편이 퇴근해서 하는 말에
나는 김이 빠졌다.

‘도로시아 알지?
걔가 폴란드에서 왔잖아.
걔가 그러는데
폴란드에 자동차 도둑이 그렇게 많대.
특히 외국번호판을 단 자동차는 십중팔구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네?
외국에서 잃어버렸으니 찾기는 건 포기해야할거구.’

그러고 보니 불가리아에 자동차로 여행을 갔다가
차를 잃어버린 한 사람의 얘기가 떠오른다.
불가리아에 살고있는 친구네를 잠깐 방문한 사이,
10분도 안되는 그 새
자동차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단다.
안에 여권이며 지갑이며 옷가지며
모든걸 놓고 내린 바람에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 얘길 들으니 나도 좀 불안하다.

역시 맘편하게 여행하려면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떠나야 하나 보다. 

우리는 가까스로 합의본 여행계획을
또 수정해야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소심해진 30대의 나는
무모했던 20대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
1995년 10월,
나는 직장을 관두고
오랜염원이었던
4개월동안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단돈 400만원과
4개월 여행엔 형편없이 작아보이는
등산배낭 하나 달랑 들고.

고생하며 여행할 생각을 하고
 짐을 최대한 간소하게 쌌다.
일반 배낭보다 조금 더 큰 등산배낭을 준비했고
옷은 버릴만한 허름한 것들로만 싸서
짐이 부담스러워질 때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관리하기 불편하므로
삼단같은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싹둑 잘랐다.

여행지는 남들 다 가는 유럽여행 코스인
런던에서 출발하여 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시작해서
런던으로 나오는 것으로 짰다.

그 겨울에 북극 접경선까지 가서
오로라를 보고싶다는 생각에서
북유럽을 여행의 시작으로 잡았던 것이다.
그것도 스물다섯 아가씨 혼자서.

이렇게 야심만만하게 여행을 시작했건만
당시만 해도 나는
외국인을 본 적도,
외국에 나가본 적도,
영어를 해본 적도 없었다.

스톡홀름이 가까워지니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별의별 무서운 생각들이 다 드는 것이었다.
방정맞은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했는데
김포공항서 부친 내 배낭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타고간 케세이 퍼시픽 항공사로 가서
내 짐이 없어졌다고 했더니
내가 묵을 호텔을 알려주면
그리로 내일이나 모레까지 짐을 배달해 준다나?
나같은 배낭여행자가
호텔을 예약할리 만무하건만...
할 수 없이 여행책자에 나온
유스호스텔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공항을 나왔다.
까만 괴나리 봇짐만 달랑 든 채.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엘 올랐는데
버스비가 얼마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나라 공항버스비만 생각하곤
한이천원 되는 잔돈을 손에 쥐고
버스기사에게 보여줬다.
(전혜린이 독일에 첨 도착해서 했던 것 처럼)
버스비만큼 집으라는
시늉을 하였더니
나보고 내리라는 손짓을 한다.

버스를 잘못탔나 하고 내려선
버스행선지를 보며 기웃거리는데
버스는 붕 하고 떠나버렸다.

같은 행선지의 다음 버스에 올랐다.
여자기사다.
이 기사에게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손에 쥐고 보여줬더니 지폐를 뽑는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20분남짓한데
버스비가 7천원이 넘는다.

그런고로 처음 버스의 기사는
내가 어깨에 맨 것도 달랑 괴나리 봇짐 하나지,
입성도 초라하기 그지없지,
해서 거지인줄 알았던 게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건만
벌써부터 기가 죽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오니
아침 8시다.

처음 와본 유럽의 도시가
내겐 너무 아름답고 낯설다.
시내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는데
내가 꼭 영화속에 들어와있는 듯 해서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버스기사도,
수퍼의 점원도,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영화배우인 것 만 같았다.

이렇게 많은 외국사람들은 생전 첨본다.
외국사람이 넘쳐나니
이곳에선 내가 도리어 외국사람이다.

나는 집에 안전하게 도착했으니
걱정말라고 전화를 해야했다.
보나마나 우리 엄마 아빠
나한테서 전화올까 싶어
전화통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돈을 환전하여 전화카드를 하나 샀는데
거기엔 국제전화 코드번호가 없다.
칠칠치 못하겠스리 그걸 미리 알아오지 않고
하며 스스로를 마구 자책한다.

백번도 더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가게점원에게
한국 국제전화코드를 좀 알려달라고 말했더니
점원이 몇 번이라고 알려준다.

그대로 전화를 했더니 한국말이 들리긴 한데
우리나라가 아니라 북조선 인민공화국이다.

나는 외국에서 바보가 된 심정이었다.
화장실을 갈래도 사용료가 500원이나 되는데
마침 500원짜리 동전이 없어서 못가겠고,
집에 전화를 할래도 못하겠고,
식당앞에 쓰인 메뉴판을 읽지도 못해
하루종일 음식다운 음식도 못먹고,
종일을 돌아다녔으나
여행책자에 나온 호텔도 못찾았다.

\'바보야, 이 바보야!\'

나는 내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같았다.

이 바보가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모두 돌아갈 집이 있겠다 생각하니
너무 외로워서 눈물이 났다.
왜 여행을 떠나왔는지 후회가 됐다.
4시가 되니 거리가 어둑신해져서
빨리 하룻밤 잘 곳을 찾아야 했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벤치에서 일어나
걷고 또 걸었다.

거리의 간판들은 코딱지만하여
우리나라처럼 쉽게 눈에 띄질 않는다.
어디가 병원이고 어디가 식당이고 어디가 여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터덜터덜 걷다가
어떤 여행안내소를 만났는데
거기 직원이 내겐 구세주였다.
친절하게 밖에까지 나와서
타야할 버스를 알려줬고
몇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야할 지도 알려줬다.

나는 어두컴컴해져서야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거기는
잠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