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님께
1) 집과 장애인
j님, 장에 가다 장판에서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사지 중 한 팔 만 있는
그는 몸둥이를 검은 고무판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일때마다
고무판이 실룩거리며 그를 옮겨 놓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의 틈새를 지날때 몸둥이가 검은 고무판을 벗어 나지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지가 없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그 집이 생각나더군요.
그 집이라니? j님, 그렇게 물으실 수 있겠군요. 제가 말씀드린 적
이 있을꺼예요. 전에 살던 집 얘기. 자고 일어나 보니 길이 없어졌더
라는. 기억하시겠지만 혹 잊어 버리셨을까봐 사족을 다네요. 이웃
아저씨가 제 땅이라며 집 앞의 길을 포크레인으로 파 버렸던 일 말예요.
밤 새 몰래. 며칠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처럼 기습적으로.
사지를 잃은 장애인을 보는 순간 길을 잃어버린 집이 생각 난 건 상실에
대한 아픔의 도출이겠지요? 가끔씩, 아니 매일 몸체만 덩그런히 남은
그 집이 그리워집니다. 너무 멀리 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생활이
팍팍해서 라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그 집을 떠나온 후로 한 번도 가
보질 못했습니다. 집도 사람마냥 몹시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힘이 있다
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아는 동생한테 그 집을 사진찍어서 보내
달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 가다가 카메라를 잊어버렸지뭐유\"
주인을 잃은 집은 까까머리 학생마냥 깔끔히 정돈됐던 푸른 정원이
더벅머리 총각모양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행복하게 햇살아래 서 있던 가냘픈 나팔꽃이 억센 풀과 멀끄댕 질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보여줘봤자 마음이 상할 언니에 대한 마음
씀씀이 왜 모르겠습니까?
집, 그 집은 나의 꿈이었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삶이 다 낡고
헤져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나이든 어른들과 함께 삶을 살고 싶은게
꿈이었는데 노인을 모시는 일때문에 길을 빼앗기고 마침내 그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뱀의 창자가 터진 것 같이 흉칙해진 그 길을
나오면서 반드시 아늑하고 멋진 집을 지으리라 다짐하며 한없이
작아지는 마음을 추스려야했습니다.
어떤이가 내게 물었었지요. 너는 왜 멀고 힘든 길을 가려하냐구요?
글쎄요 그건 아마도 사랑에 빠진 어떤이에게 넌 왜 저 사람을 사랑
하느냐고 묻는 질문과 같은 걸 꺼예요. 그냥 좋아서 라 말하는
끌림의 선택, 본능적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본능적 선택을 어찌 설명해 드려야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될까요?
그럼 어릴 적 이야길 잠깐 해야겠군요. 좀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요
말 나온김에 얘기를 할께요. 학령전기에 외할머니가 4년 정도 저희집에
계셨습니다. 그때 부모님이나 언니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던 할머니께서는
어쩐 일인지 제게만은 유난히 모질게 대하셨어요.
\"움직임이 굼 떠가지고는\"
\"계집이 얄상하게 생겨야 하는데\"
\"나이에 맞지않게 대갈박은 잘 굴리는군\"
저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할머니에게는 타박의 이유가 되었지요
할머니의 손에 닿는 건 모두 매였고요. 밥상에서는 숟가락이, 부엌에서
는 후라이 팬이 세숫대야가, 광에서는 호미자루가 .......
j님, 제 상처가 깊었었나 봅니다. 보살핌을 외면당한 상처는 누군가를
돌봄으로써 치유가 될 것 같다는 내면의 요청을 받아 들인 걸 꺼예요. 이런 걸
\'감정의 승화\'라고 표현하는게 맞지요?
\"내 영혼에 햇빛비취니~ ~ \"
어제 만난 장애인의 잡화 리어커에서 흘러 나오던 노래였습니다
그는 언제부터 장애자가 되었을까? 어느날 갑자기 사지가 달아난 당혹감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달아난 사지, 길과 함께 사라진 꿈의 상실, 매맞은 흔적.....모두는 아픔의
흔적입니다. 장애의 흔적입니다. 허나 그 흔적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그가,
마음의 장애를 가진 제가 극복해야 할 삶의 동력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