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 마루 위에 남학생이 앉았다.
그리고 집 안을 휑하고 둘러보았다.
무관심한척, 소녀가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가 TV를 켰다.
진영이와 막내 동생 호진이와 ‘바야바’가 쪼르르 따라 들어와서 곁에 앉았다.
소녀의 무관심에 살짝 당황했는지 남학생은 쉬이 방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야, 강 철수. 어서 일어나. 가서 밥 먹자.”
신발도 벗지 못한 남학생이 방 쪽으로 배를 깔고 엎드려 동생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TV 앞에 앉아있었지만 눈으로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모든 촉각은 이미 그에게 쏠려 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
두근두근....
귀를 울리고도 남을 것 같은 심장소리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될까봐 신경 쓰기에도 급급했다.
“싫어, 밥 안 먹어. 또 라면이잖아.”
‘바야바’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또 라면이잖아...어린 것이 말한 것 치고는 맺힌 것이 많은 듯한 말투였다.
그 아이의 생뚱맞은 말에 반사적으로 소녀가 남학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학생으로 인해 상기됐던 소녀의 얼굴처럼 그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이번엔 남학생이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라면 아냐. 그러니까 가자.”
“싫어. 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헉...‘바야바’의 입을 빌어 나온 말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을 일이었다. 철수의 시선은 tv에 목 박혔고 미동도 없이 입만 움직이고 있었다.
소녀로 하여금, 이사 온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게 만든 두 사람이 한 형제였다니, 생긴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이 형제였다니... 뒤늦게 놀란 소녀였다.
하지만 닮았던 안 닮았던 이제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최후통첩(?)이라도 떨어진양, 기필코 자고가고 말겠다는 결의에 찬 철수의 말 앞에서 이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소녀의 고민.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일, 낯선 아이를 집에서 재우는 일은 고지식의 대명사인 부모님에게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던 소녀였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의 청을 들어주기로.
‘그래, 바야반지 뭔지 여기서 재워주지 뭐. 동생이 저렇게 원하는데. 난 워낙 동생 일에 약한 누나 아니겠어?’
굳이 그 아이가 남학생의 동생이라서가 아니라고 스스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에 자신 없는 소녀이기도 했다.
‘그런데 라면이 왜 지겹지? 매일 라면만 먹나?’
“너, 듣던 것보다 얌전하다. 그런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나.”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소녀에게 남학생이 말을 시켰다. 듣던 것보다라니... 벌써 내 얘기를 들었단 말이야? 누구한테... 난 오늘 처음 봤는데... 소녀는 마음만큼이나 머리까지 복잡해졌다.
“내...얘기를 들었어?”
“응. 참, 내 이름은 철. 강 철이야.”
이름도 쌈빡하니 외자인 남학생. 소녀는 그 이름을 여러 번, 속으로 뇌까렸다.
“넌?”
대꾸 없는 소녀에게 남학생이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 참 맑다는 생각...을 하던 소녀는 그의 물음에 대꾸도 않고 뚫어져라 남학생을 바라보는 자신을 느끼고 다시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누구에게도 당당하던 자신이 왜 자꾸만 그 앞에서 수그러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영미야.”
“그래, 맞다. 이제 생각난다. 영미.”
“날 어떻게 알아?”
“형태가 내 친구거든. 자주 만나서 어울리니까 우연히 사촌동생이라는, 그리고 내 동생 친구이기도 한 진영이 얘기가 나왔구, 그러다가 진영이 누나라는 네 얘기도 들었지.”
철의 말에 소녀는 더욱 당황했다.
형태라면 옆집에 사는 막내사촌 오빠를 말하는 거다.
언제나 오냐오냐 받들어 커서, 남의 사정 따윈 관심도 없는, 거기다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녀석. 소녀보다 2살이나 많았지만 소녀는 사촌을 오빠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형태는 맨 밥에 캬라멜 알맹이를 까 넣어서 함께 섞어 먹는 특이한 식성의 대부(?), 가끔 콜라에 밥도 말아 먹었다.
밥 다 먹으면 상으로 뭘 줄 거냐고 제 엄마(이모)에게 당당히 묻는 싸가지의 대명사.
소녀의 집, 음식 갖고 장난하면 용서 없다. 더군다나 굶지 않고 먹는 것만도 감사하라는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질문을 물었다가는 뼈도 못 추릴 일이건만 그의 가족들은 막내의 그 말에 폭소를 자아내고 ‘뭘 해줄까?’ 하고 묻는 상식이하의 가정사가 소녀는 이해되지 않았다.
매일 빚쟁이가 찾아오는 판에 밥상에 늘 오뎅 볶음과 닭도리탕이나 장조림이 떨어지지 않는 그 집은 소녀에게 있어 여러모로 불가사의였다.
사촌과 친구라니 그럼 자신보과 2살 차이란 계산이 떨어졌다.
그보다, 그런 엽기적인 사촌에게 자신의 얘기가 좋게 나왔을까? 만무한 일이다.
소녀는 생각했다. 분명, 그 옛날 형태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로 언덕 빼기에서 겁 없이 오르락 거리며 몇 번 논두렁으로 곤두박질 쳤던 얘기와 그래서 엉망인 자전거가 더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을 크게 부풀려서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이모부 자가용의 타이어를 펑크 냈던 일과,
총싸움 하다가 이모네 장독 몇 개 깬 것까지 모두 고해 바쳤을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가 또 무슨 일을 저질렀더라? 대략 남감해지는 소녀...
철이라는 남학생에게 신경을 끄자고 그리 다짐했건만... 사촌이 자신에 대해 쏟아냈을 온갖 모함(?)에 대해서 어찌 받아들이던 신경 끄고 싶고 싶었지만... 소녀는 어떻게 변명부터 해야 하나 또다시 복잡해졌다.
“난, 여기로 이사 온지 1주일쯤 됐어. 잘 부탁한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자.”
“아이구, 형! 또 시작이다. 여자들 앞에서 혼자 멋진 척하고. 누나, 우리 형 여자 친구 엄청 많다. 매일 편지오구 선물도 한 가방씩 받아 와.”
제 형의 말에 톡 끼어들며 참견하는 철수의 말에... 소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불끈 하는 뭔가가...엄마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과 친하게 대화하면 생기곤 했던 질투 비스무리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 잘 생겼으니 여자 친구가 많다는 말에 새삼 놀라울 것도 없구먼, 소녀는 어떤 정신 넋 빠진 가시나가 그에게 대놓고 들이댈까 심통까지 일었다.
그리고 그런 편지와 선물을 자랑스레 제집까지 들고 갔을 철의 정조(?)가 의심스러워졌다.
‘아무 여자만 보면 껄떡 된단 말이야?’
무덤덤하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솟아드는 야릇한 감정,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다는 황홀함과 견제해야할 여자들이 많다는 버거움과 남자에게 관심을 끊자는 억지스런 마음과 바람기 다분한 듯한 남학생에게 더 이상 끌려가지 말자하는 여러 마음.
소녀는 그렇지 않아도 늘 상 복잡한 머리였건만 철이를 안 순간부터 더욱 난해한 생각의 강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내가 무슨 여자 친구가 많다고 그래, 자식이. 너 정말 밥 안 먹을 거면 나 혼자 간다. 이따가 밥 달라고 하면 혼나.”
동생의 폭로에 발끈했는지 철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동생에게 협박(?)했다.
그 말에도 굳건히 ‘알았어’하고 대꾸한 철수는 등 돌려 나가는 제 형에게,
“나 여기서 잔다고 엄마에게 말해줘.” 라고 했다.
철은 소녀에게 인사도 없이 휑하니 나가버렸다.
7시가 훨씬 넘어 들어 온 소녀의 엄마. 아빠는 역시나 늦나보다. 그냥 들어오시는 법이 없으니 새삼 불만스러울 것도 없었다.
소녀의 엄마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깨끗하게 정리된 집을 보며, 왜 자꾸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느냐는 잔소리 몇 마디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도 잠깐, 방 정리한 포상으로 제법 많은 용돈을 받았다.
그리고 팔지 않고 갖고 온, 산 낙지로 딸이 좋아하는 낙지볶음과 새우, 게, 가자미가 들어간 매운탕을 얼큰하게 끓여서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진영이의 친구 철수도 덕분에 호강 거하게 하는 저녁상이 되었다.
소녀는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하는 엄마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 진영이가 제랑 자고 싶은가봐.”
“잠은 집에서 자야지.”
넌지시 꺼낸 말에 역시나 쉽게 허락하지 않는 엄마의 말에도 소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철수를 처음 보는 소녀와 달리 엄마는 그 아이를 벌써 잘 아는 듯 했다. 설거지 하다 말고 방에서 아이들끼리 tv보는 쪽으로 시선을 잠시 멈췄던 엄마가 혀를 끌끌...찼다.
“아이, 엄마~. 한번만~. 내방에서 조용히 잘게. 허락해~줘~어. 엄~마~”
“애가...?”
설거지 하는 엄마를 귀찮게 하는 소녀를 엄마는 옆 눈으로 흘겨보았다.
엄마의 표정엔 그런 일로 고집 피우던 딸이 아니었으니 의외라는 표정이 숨어있었다.
그리곤,
“그래, 그럼. 한번만이야. 새벽 3시에 아빠엄마 일 나가야 되니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기다.”
하고 흔쾌히 허락했다.
방에서 그 소리를 엿듣던 진영이와 철수가 지들끼리 몸을 끌어안고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라했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고개를 안으로 쓱 내밀었다.
철이었다. 소녀의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듯 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서 와라. 밥은 먹었니?”
“네...”
“네 동생은 여기서 자고 간다고 하던데, 집에다 허락 받지 않은 거니?”
“아뇨...”
수줍은 듯 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엄마가 멈췄던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 소녀와 눈이 마주친 철이 소녀에게 살짝 손짓을 했다. 잠깐 나오라는 제스처로.
‘언제 봤다고 나오라 말아야?’ 하고 충분히 따지고도 남을 소녀가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밖은 벌써 짙게 어둠이 깔려있었다. 밤의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니 세찼다. 달이 가깝고도 환하게 둘을 비췄다.
“나도...너희 집에서 자면 안 될까?”
“!!!”
하루 안에 일어나는 갑작스런 여러 상황, 난생 처음 보는 멋진 남자와의 만남과 그로 일해 겪어보는 이상야릇한 감정과 우연히 겹치는 인연등등...
오늘 처음 본 멋진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잠 좀 재워 달라니...기쁘다면 기쁘고 황홀하다면 황홀할 그 일... 하지만 왜 마음이 이리도 불안 한 걸까?
소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한명 재우기도 어렵게 허락 받았건만 두 명을 재우겠다면 엄마의 반응이 어떨까? 소녀는 벌써 어떡하면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을지 생각하기에 급급했다.
왜 그들의 멀쩡한 집을 나두고 다들 밖에서 못나와 자서 안달인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마냥 속으로 복잡한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