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도둑
열흘간이나 우중충했던 날씨가 드디어 맑게 개었다.
낮 최고 기온 25도. 완연한 함부르그의 여름날씨다.
빨래를 하자.
남아도는 햇빛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옷장을 뒤져 이미 빨아놓은 속옷을 죄다 꺼내 1차로 빨아 널었다.
이불도 탈탈 털어 속은 창가에 널어두고 겉은 세탁통에 넣었다.
오늘은 이불보, 메트리스싸게, 베게싸게, 식탁보, 타올, 행주, 묵은 빨래까지 다 빨리라.
세탁기를 간편세탁 7번에 맞춘다.
세탁기가 돌아가니 내 마음도 덩달아 급해진다.
‘빨랫줄이 어디있더라?’
서랍을 뒤져 빨랫줄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딱 1년만이다.
밖에다 빨랫줄을 치고 빨래를 너는 것이.
갑자기 발랄해진 나는 집안을 뛰어다니며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혔다.
그리곤 빨랫줄을 가지고 나가 우리 아파트 잔디밭에 매었다.
5미터는 족히되는 빨랫줄을 다섯 개나 매었다.
팽팽히 당겨서.
내 세탁기는 작은 5킬로짜리라 빨래가 더디다.
해서 대여섯번은 돌리고서야 빨래가 끝났다.
휴, 벼락빨래다.
계단을 여러번 오르락내리락 하며 빨래들을 널었다.
티셔츠는 줄맞춰 티셔츠끼리,
타올은 줄맞춰 타올끼리,
바지는 줄맞춰 바지끼리,
이불호청은 줄맞춰 이불호청끼리.
박완서의 소설에 나오는 육이오 직후의 빨래터처럼
여건이 된다면 오늘 이것들을 죄다 가마솥에 넣고
잿물을 우려내어 삶고 싶지만 이것만도 어디냐.
‘너희들은 오늘 고슬고슬 마르리라!’
빨래를 끝내고 텅빈 빨래바구니를 들고 잔디밭 모퉁이 벤치에 잠시 앉았다.
일사분란하게 널어 놓은 알록달록한 빨래들이 참 예쁘다.
빨래들이 바람에 산들거린다.
바람이 조금만 부는지 구름도 천천히 흘러간다.
나는 누군가 툭 하고 민 것처럼 벤치에 벌렁 자빠져서는 누웠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조용하다.
4시간동안 빨래를 하느라 내 몸은 푸들푸들한 누룩반죽마냥 축 늘어졌다.
‘한숨 잘까?’
눈을 감으니, 지금까지 맡지 못했던 냄새들로 사방이 가득찬 듯 하다.
갓 깍은 잔디냄새, 향긋한 세제냄새, 멀리서 흘러오느라 희석된 말똥냄새와 유채꽃냄새.
벌써 점심땐가? 양파볶는 냄새도. 잠이올 것 같다.
스르르.
헌데,
‘거기서 뭐해?’
오전에 정비소갔던 남편이 되돌아온 모양이다.
제기랄
잔디냄새가, 세제냄세가, 말똥냄새 섞인 유채꽃냄새가 후두둑 날아가 버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긴. 빨래 빨았어. 이거 다 우리 빨래야.’
‘비싼 바지를 왜 밖에다 널어놓구 그래. 갖고 들어가자’
그는 기껏 널어논 바지를 주섬주섬 걷으려한다.
그의 손길을 멈추게 하고싶지만 귀찮다.
‘이게 뭐 비싸다고 그래. 벼룩시장에 갖다 팔면 개당 3천원도 못받을 중고바지를.’
그래도 남편은 지난 겨울에 산 내 리바이스 청바지 두 개를 걷어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저께 윈이 전활했는데 글쎄 빨래를 도둑맞았대.’
‘빨래를? 요즘같은 세상에 빨래도둑이 다 있어?’
‘돈이 없어서 그랬겠어? 재미로 젊은 객기에 남의 것 훔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요즘 세상에 빨래도둑이라.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취미형 도둑이렷다.
웃음이 피식 난다.
빨래를 도난당한 얘기의 즉슨 그렇다.
윈이라고 남편의 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20대 후반의 중국계 아가씨가 있다.
중부 독일 헤센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직장을 구하느라 1년 전에 함부르그에 온 이다.
그저께 윈은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빨래를 해서 복도에 널어놨단다.
그 아파트는 원룸 독신자 아파트라 좁고 베란다가 없어
윈은 빨래를 하면 늘 복도에 널어놓는데
그저께도 늘 그렇듯이 별 생각없이 복도에다 빨래를 널어놓은 모양이었다.
저녁답에 불현듯
누군가 복도에 서서 윈네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었다.
누군가 해서 구멍으로 내다보니 열여섯, 일곱정도 돼보이는 여자애 둘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 아파트 주민은 아닐텐데 하는 호기심 반, 불안함 반으로
문도 안열어주고 우선 물었단다.
‘누구찾아 왔어요?’
그랬더니 둘 중 한 여자애가 한다는 소리가,
‘우리 비를 맞아서 너무 추운데 옷 두 벌만 좀 빌려주시면 안될까요?’
나 원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옷을 빌려 달란다.
젖먹이를 안은 헐벗고 굶주린 여인네도 아닌
생긴 것도 멀쩡하고 입성도 멀쩡한 보통 애들이.
엉뚱하고 기가찼지만 혹시나 해꼬지를 당할까 두려운 생각에 좋은 말로 대꾸했다.
“요 아래 월마트 있으니까 거기서 사 입으세요, 추우면!”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뿔싸 빨래를 복도에다 널어놓은 것이다.
그래도 설마 아직 마르지도 않아 꾸덕꾸덕한 걸 집어갈까 싶었는데...
여자애들 둘은 히히덕거리며
안에 있는 옷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빨래 건조대에 널린 옷들을 마구 뒤진다.
눅눅한 것들 중 자기 식미에 맞는 것을 걷어 대보고 맞춰보고 하더니
잠바 하나와 스웨터 하나를 집어갔단다.
다른 이도 아니고 옷욕심이 많은 윈이
바로 눈 앞에서 옷을 도둑당했으니 얼마나 속상해했을까 싶다.
그러다가도 내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난다.
내가 이 사건을 너무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여자애들이 재미로 빨래를 훔쳤을 거란 생각이 든다.
10대 때는 다들 그렇게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마냥 엉뚱한 짓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점잖은 우리 남편만 하더라도 지금은 시민의식이 투철한 시민인양 행동하지만
그가 열너덧 살 땐가 한 백화점에서 초콜렛을 훔친 적이 있었단다.
그것도 부끄러워서 아무소리 않다가 결혼 6년만에 내게 이실직고한 것이다.
그의 주변머리로 성공했을 리는 없고 훔쳐서 들켰단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니
‘뭘 어떻게 돼, 그냥 그 뿐이지’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냥 그뿐은 아니었고 벌을 받긴 받았단다.
1년간 그 백화점에 얼씬도 못하는 벌을.
백화점 매니저에게 이름과 주소와 학교까지 적혀서는.
당시에 그가 초콜렛 살 돈이 없어서 그랬겠는가.
재미로 젊은 객기에 뭔가 중뿔난 짓을 하고싶어서 그랬겠지.
그땐 초콜렛을 훔쳐 이름까지 적혔던 초콜렛 도둑인 그도
지금은 정신 똑바로 박힌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뿐인가, 연말마다 바로 그 백화점에서 타올을 사기도 하는걸.
요즘 그는 점점 나이들어가는 티를 내느라
‘요즘 애들말야...’로 시작되는 푸념을 자주 늘어놓곤 한다.
공부는 안하고 밤늦게까지 몰려다니면서 담배를 피워대는 싹수노란 것들,
지하철에 앉아 맞은 편 좌석에 발올리는 공공의식 없는 것들,
자연보호구역에서 개를 풀어놓고 거위들을 놀래키는 한심한 것들,
한번 입고 버릴 거면서 남의 집에서 빨래를 훔치는 것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그런다.
‘걔네들 알아서 다 잘 클테니까 당신 앞가림이나 잘 하시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