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언덕배기에 있다보니 11호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나는
그 언덕에만 오르면 엔진에 과부하가 생겨 기어 정리를 해야 한다.
기어를 1단에 놓고 천천히 조심스레 오르지 않으면 중간 멈춤이 생겨서
나는 운전대를 놓고 쉼 호흡을 한 후 다시 한 번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아야 되는 수고를 지금 7년째 하고 있다.
그렇다고 절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찌해서든 11호 자가용이
고장 나지 않게 애지중지 해야 하기에 요즘 나름대로 기름칠 하고
닦아서 겉으로 보기엔 아직 쓸만해 보인다.
내가 아무리 11호 자가용 운전을 잘 하기로서니 양 손에 떡을 쥐고 오는 날이면
볕 뜨거운 여름에는 그야말로 고역이다.
이제 적응이 될 만도 하고 나름대로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갈수록 엔진 기운이 달린다.
하여, 요즘은 11호 대신 다른 고유번호 달린 자가용으로
대형마트로 나들이 가는 주말 행사를 가지면서 양손잡이 노릇은 하지 않으려 하고는 있다.
요즘 날씨가 무섭게 덥다.
이럴 때 필수품이 모자나 양산이라 했다.
모자가 어울리지도 않지만, 등산이나 갈 때면 몰라도 외출 시에는
모자를 잘 쓰게 되지가 않아, 벽에 걸린 아이들 모자가 많아도
기껏해야 동네 뒷산에 산보 갈 때나 슬쩍 쓰는 것이 전부다.
하여, 하나 장만한 것이, 햇빛 가리개로 안성맞춤이라는 양산이다.
처음에 이 양산을 쓰자니 그것도 참 설었다.
양산도 하도 다양해서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늬와 색깔을 보고 손잡이를 보고 가격이 맞으면 되겠지 싶었는데
막상 사자니 거기서 거기다 싶으면서도 각양각색이어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침 다니러 왔던 친구와 둘이 심사숙고해서 고른 양산이 지금 3년째 쓰고 있는
것인데, 작년에 어느 지하철 몇 번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를 기다리다가
출구 앞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잠깐 앉으면서 깔고 앉았던 것이 양산 집이었다.
평소에는 시장용 접이 가방을 주로 썼는데 그날은 양산 집을 깔개로 깔고 앉았다.
양산은 고이 접어 손에 쥐고 있다가 친구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둘이 손을 잡고
얼른 밥집으로 들어가는 바쁜 걸음을 옮겼다.
반나절의 수다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 11호 자가용은 여전히 늙은 굉음을 내었지만
그래도 그늘을 만들어 주는 양산이 있어주어 고마웠다.
일과를 마무리 하면서 양산도 정리를 하였다.
내일 또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헌데, 양산 집이 없어졌다.
가방을 뒤져도 없고 기억을 끄집어내도 모르겠고,
결국 지하철 출구 앞에서 깔고 앉았던 양산 집을 무단투기 한 죄로
어설픈 수사 마무리를 지었다.
집 없는 양산은 작년 가을 햇살을 비켜가면서 빨간 우산 집을 빌려
구색도 갖춰지지 않은 어색한 전세를 살았다.
남의 집에 들어앉은 티가 확실히 났지만 우산과 양산이 어우렁 거리며 사는 모습도
익숙해지고 예사로 넘어갔다.
다시,때는 바야흐로 더위 사냥에 나설 계절이 되었다.
벌써부터 양산 부대가 밀려들고 있었지만 나는 지난 일요일,
아버님 산소에 가던 날 땡볕을 면해보고자
우산 집의 양산을 꺼내 세상 구경을 시켜주기로 했다.
약간 아이보리 바탕에 보라색 꽃무늬가 있는 양산인데
살 때부터 때 타는 것에 민감 반응을 보이기는 했으나
양산 집에 잘 보관하면 된다는 점원의 말을 믿은 탓과
나의 관리 성적에 의해 이태를 깨끗하게 잘 썼다.
아버님 전에 술 한 잔 따르고 네 식구 오도카니 들어앉기는 좁았지만
부족한대로 세 모녀 고개 들이 댈 양산을 펼치면서
양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너 참 요긴하게 쓰여 주는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렇게나 접어 둔 양산을
곱게 펴 관리하려는 내 눈에 거슬리는 그 무엇은,
양산의 접힌 자국에 선명한 때 자국이 겹쳐져 있는 것이었다.
이단짜리 양산이다 보니, 반으로 접혀 뒤집어진 안쪽이 밖이 되어
누리끼리한 때가 골고루 묻어 있는 것이었다.
펼쳤을 때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때가 속에 그렇게 묻어 있었다니,
저걸 빨면 때가 빠지려나,
양산은 우산과 달라서 물에 닿으면 자외선 차단 효과가 없다던 말이
낭설인지 확인해 보지 않아 모르겠고,
남편은 보나마나, ‘ 때 좀 탔으면 어떻노.’ 할 테고,
아이들이야 저들이 쓰는 물건이 아니니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테고,
나는 새로 사야 되나,못 본 척 하고 그냥 쓰나 고민 중에 무심코 뱉은 말이,
‘양산이 더럽네.’ 거기다가 한 마디 더하기를,
‘그렇다고 사 달라는 건 아니다~.’
‘어디서 듣던 소리 같어 엄마.’ 큰 아이가 갸우뚱 거린다.
어느 보청기 광고 중에 시골에 늙은 아버지가 자식한테 하는 소리다.
보청기를 하니 잘 들린다만 그렇다고 너한테 사 달라는 건 아니라는 말에
웃음 지었던 광고를 나도 한 번 써먹었다.
은근한 협박(?)성 발언을 눈치 챈 큰 아이,
‘아이구 하나 사 줄게.’
엉겹결에 성공했다.
나 처럼 덧붙인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바로 사 준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