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나 어릴적에
울산 고모가 할머니를 두고 ‘어매’라 불렀다.
어린 나는 고모더러 엄마 아니면 어머니지 ‘어매’가 뭐냐고 지청구를 주었다.
그런데,
육십이 넘은 우리 엄마,
점점 엄마가 아닌 어매를 닮아간다.
한국엘 1년이나 2년에 한번씩 갈때마다 우리 엄마 키가 자꾸 작아지고
주름도 많이 보여 어매같다.
그래도 나는 매번 말한다.
‘엄마, 어쩜 그동한 하나도 안변했어!’
그건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위로인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죽어라 따라다녔다.
학교갔다 대문을 빵차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방을 마루에 던져두고는,
‘엄마아-’
하고 송아지처럼 소리쳐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안보이면 엄마찾아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진다.
모레알 상회, 대구약국, 편물점...
그시절,
지금의 나와 나이가 같았던 엄마는,
모레알 상회 찐빵통 위에 손을 얹고 도국이 엄마랑 얘기하고 있거나,
편물집 쌍둥이엄마에게 꽈배기 뜨기를 배우고 있거나,
대구약국 아줌마의 자식자랑을 들어주고 있기 십상이다.
엄마를 발견한 나는 투정부리듯,
‘엄마아- 씨,’
이러면 우리 엄마는
수다를 멈추거나 꽈배기 뜨기를 멈추고
나랑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오는 내 손엔 연양갱이나 박카스가 쥐어져 있기 마련이다.
엄마가 시장엘 가려고 낌새를 보였다 하면
나는 눈치 빠르게 모든 놀이를 중단하고
대문밖 전봇대 뒤로 가서 숨는다.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100미터쯤 앞서가기 시작하면
전봇대에서 튀어나와 엄마를 조심조심 따라간다.
운이 안좋으면 오빠와 남동생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이럴 때면 엄마는
우리 셋을 외출하는 주인 따라오는 강아지 ㅤㅉㅗㅈ듯이 집에 가라고 소리지른다.
그래도 우리는 숨어숨어 킥킥대며 계속 엄마를 따라간다.
따라오는줄 알고 있는 엄마,
몸을 획 돌리며 발로 땅을 탁 구르고,
입술을 깨물며 무서운 표정을 지으신다.
이쯤되면 오빠와 동생은 순순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엄마가 돌아보실 때마다
풍어낚시사, 신일약포 등지에 숨었다가 끝까지 따라간다.
시장통이 시작되는 고무신가게까지 따라오면
엄마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
그때 나는 한달음에 엄마에게 달려가 손을 덥석 잡는다.
나는 엄마랑 시장다니는게 참 좋았다.
뚱보아줌마네서 고추튀김을 얻어먹을 수 있었고,
겨울이면 호떡에 오뎅국물도,
여름에는 냉차도 얻어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건어물전에선 돌돌 돌아가며 가마솥 위에서 볶이는 깨소금 구경도 재미났고,
기계에서 뱀처럼 기어나오는 골미떡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물전 구경이 제일이다.
주인아저씨가 뱀장어 머리를 탁 쳐서는 모가지를 비틀고
검고 반질거리는 껍질을 쫙 벗겨 썰어주는 아나고회.
운이 좋으면 그 구경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와 손잡고 다녔던 그 시장통 구석구석의 냄새를 다 기억한다.
엄마를 이렇게 따라다녔던 까닭에 외할머니는 나를 보고는,
‘니 때문에 니 엄마 송기난다.’
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그 송기난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 말투에서 어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당신딸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외손녀가 그다지 탐탁지 않으시구나 하고.
여름방학이면
엄마는 우리를 종종 외갓집에 보내서 1주일에서 2주일정도 놀다오게 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여행은 즐거웠지만
엄마없이 1주일을 보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당시 엄마는 시집살이를 하고 계셨기에
단 하루라도 우리와 함께 외갓집에서 자고가는 일이 없었다.
늘 우리를 데려다주고 조금 앉았다가는
다시 횡하니 길을 떠나셨는데
그때 엄마의 뒷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국민학교 3학년 여름방학인가 그랬을 것이다.
엄마는 자주색 목단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언니랑 나를 외갓집에 데려다 주셨다.
한나절 외갓집에 계셨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떠나셨는데...
나는 외할머니가 야단칠까봐 차마 엄마를 따라나서지는 못하고
대문뒤에 숨어서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끄러워 소리내 울진 못했지만 내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눈안에 눈물이 가득차
엄마의 목단꽃이 눈안에서 너울거렸다.
그 목단꽃 원피스가 작아질 때까지,
점보다도 더 작아져 안보일 때까지 그러고 서서 훌쩍거렸다.
엄마가 떠난 후에도
수시로 대문앞에 서서 혹시 목단꽃 원피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염없이 그 길을 바라보았던 기억.
누가 엄마를 잡아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그리 죽어라 엄마와 같이 있고 싶어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4형제 중에 유독 나만...
그건 어쩌면 내 미래를 그때 내가 미리 알고 그랬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외국 타향에 나와 1년이나 2년에 한번 겨우 엄마를 만나야 하는 내 팔자를
어린 내가 알고 그랬을지 모르겠다.
결혼식때도 경황이 없었고
결혼후에도 출국준비로 바빠 엄마와 살가운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엄마와 정을 떼려고
날마다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엄마와는 얘기나누길 회피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들과 진탕 술마시고 들어와
늦은 밤에 오바이트해대는 내게 세숫대야를 대줬던 엄마.
떠나는 날,
엄마에게 공항에도 못나오게 했다.
그만큼 같이 있었으면 됐지
공항엔 뭐하러 줄줄이 ㅤㅉㅗㅈ아오냐고
아무도 못나오게 했다.
혼자 가방 두 개를 들고 새마을호를 탔고,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횡하니 한국을 떠났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 독일온지 6년이나 되었다.
독일와서 결혼식 사진을 벽에 걸어 놓으려고 사진을 찾았는데
전에 못봤던 걸 보게되었다.
결혼사진을 자세히 보니...
허허 웃는 우리 아빠와 시아빠,
하하 웃는 우리 신랑 나,
우리들 틈에 울어서 벌겋게 부어있는 엄마의 눈.
결혼땐 엄마가 울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사진속 옥색 한복을 입은 우리엄마는 울고 있다.
그 사진을 보고,
결혼식때 안울었던 나는
우리신랑 몰래 숨어서 꺼이 꺼이 울었다.
난 엄마가 울든 웃든 아프든 안아프든
살아만 있어줬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주위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겁을 준 적이 있었다.
\'니 그렇게 느그 엄마 따라다니고 귀찮게 하면 엄마 아파서 죽는데이...\'
그때 엄마가 죽는다는 공포는
내게 있어서 세상이 끝나는 것 보다 더 큰 공포여서
그 말을 듣자 마자 불에 데인듯 놀랐었다.
근데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엄마가 죽는다는 공포는
어렸을 때 그 공포의 부피와 같으면 같았지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 이제 겨우 환갑을 넘기셨는데 나 참 걱정도 팔자다‘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우리엄마가 벌써 환갑을 넘기셨나 무서워진다.
엄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서
국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