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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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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던 날들 중 하나.


BY 풀향기 2006-05-31

“오늘은 밥 먹는 것 보다 맥주 한잔 하고 싶어. “
“뭐, 썼어요?”
“응”
“그래요. 준비 할께요”

퇴근 전 귀가를 알리는 전화를 할 때 가끔씩 하는 대화다.
그럴 땐 저녁 반찬 준비하던 것을 한쪽으로 두고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안주거리를 마련하고 이미 차가워진 맥주를 냉동실로 옮겨 그가 돌아와 식탁에 앉았을 땐 손이 시리도록 차가워진 맥주를 꺼내주면 그것으로 편안한 하루를 정리하든, 불편한 하루를 달래든 한다.

부엌에 있는데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손을 닦으며 그에게로 가니 여러 꽃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포장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들어 와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이뻐라!”
“선물”
“웬, 선물?”
“서무 아가씨한테 부탁했더니 어떤 용도로 쓰일 꽃이냐고 물어서 당신 준다고 했더니 이렇게 만들어 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생일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있었구나.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보네.

“좋아라.”
고맙다는 말조차 쑥쓰러워 그냥 평소에 자주하던 “좋아라”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며 부엌으로 돌아가 저녁상을 준비하는데 자꾸만 가슴 복판이 아파오고 눈물이 고여와 애를 먹었다.

내 생일이라던가, 결혼 기념일이라던가 하는 날들을 오래 전에 잃어버려 이젠 달력에 조차 기록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오늘 남편의 행동이 그렇게 가슴 복판을 아프게 했고 눈물을 고이게 했던 것이다.

*****


아이들과 나는 그의 생일이 되어 집안에 꽃을 사다 놓고 선물을 포장해서 준비해 놓고 남편이, 아빠가 오시기를 기다리다 그날조차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에게 이쁜 꽃도 음식도 선물도 전해지지 못하고 다음날이나 또 그 다음날 쯤에 시들해져 있는 모습을 보곤 하던 어느해 그이가 말했었다.

그깢게 뭔데 신경쓰이게 하느냐고 내 생일 같은거 챙기지 말라고..
그 말은 내 생일도 다른 기념일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 채고 그 해부터 내 것의 의미도 없애고 말았다.

아이들 키우는 사람이 그렇게 하란다고 모른척 지내면 안될 것 같아 그이와 상관없이 우리 가족들은 해마다 아빠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다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남편과 아빠에게 지쳐 나도 아이들도 언제부터인지 그깢 것이라 말하는 그것을 무시해 버린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 생일날도 그저 자신들이 갖고 싶어 하던 것을 의논해 갖는 것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무시지 그의 생일이, 그의 결혼 기념일이 오면 남편 생일도 기념일도 모르는 무딘 여자처럼 멀뚱하게 보내야 하는게 싫어서 혼자 백화점도 가고 혼자 맥주도 마시고 혼자 음악도 듣고는 했었다.

그랬기에
내 생일은 내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누군가 양력 생일에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 주어 그건 양력 생일이다 말 했으면서 그리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난 참으로 적응력이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그리 나를 삭막한 곳에 내다 놓아 버리더니 오늘 불쑥 잃어버렸던 날들 중 하나를 불러와 자신도 나도 당혹케 하는지 모르겠다.

두어달 전의 결혼기념일까지 엊그제 들먹이며 내년이면 우리가 은혼식이라는 햇수가 되는거야? 묻더니…

식탁을 준비하는 동안 아껴두었던 포도주를 꺼내오고 이쁜 포도주 잔을 꺼내 물에 헹구어 내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마이클 볼튼’의 음악을 옆집 거슬릴까 걱정된다 말해도 늘 그런거 아닌데 뭐 하면서 볼륨을 높여 틀어놓고 식탁에 와 앉아 지금 듣고 있는 가수와 음악 얘기며, 아이들 얘기며, 자신의 일 얘기 등을 나누면서 바닥을 드러낸 포도주병을 치우고 내가 혼자 마시다 남겨 두었던 반병 쯤의 포도주를 또 마시며 취해갈 쯤에 둘째가 나무상자 안에 보라색으로만 꽃을 채워 들고 들어와 ‘엄마가 꽃을 좋아해서’ 라는 말과 함께 내게 안겨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있던 가수의 노래 중에 한 곡을 얘기하며 그 노래 처음 시작하는 곳을 들으면 몸이 찌릿해 진다는 얘기도 했다.(천상 내 아들이다)
음악이 너무 크지 않느냐 했더니 음악은 이렇게 듣는거라며 제 아빠와 똑같은 얘길 한다.
엄마 목소리가 조금만 커도 엄마 기분 나쁜 일 있느냐 에둘러 말하는 녀석이 오늘만큼은 우릴 봐 주는 것 같았다.

그나 저나 내일 친구들과 꽃구경 하러 먼 길 가야 하는데 놀라움에 취하고 노여움에 취하고 포도주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내 남자들이 사 들고 온 꽃들에 취하고 말았으니 어찌할까 걱정된다.

오늘은 왜 생일을 챙겨주었느냐 한번쯤 물어보고 싶은데 그냥 아서라 했다. 그런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었으니 그렇게 보내자 했을거고 지금은 챙겨주고 싶었으니 그렇게 했겠지. 그냥 또 혼자 짐작이나 해 볼까?

이만큼 세월 보내니 자신의 일에도, 자신의 삶에도 넘치던 열정은 다 넘치고 이젠 다시 본성에 필요한 만큼의 열정만 남았던게지……

아.
기분 좋게 취한 다는 것은 참 기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