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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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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푸는 날


BY 불토끼 2006-05-30


 

1980년대 우리집.

대구와 포항가는 직행버스가 30분마다 서는 직행버스정류소 맞은 편
마당넓은 집.

그 집에는 우리 가족을 비롯,
모레알 상회, 대구약국, 건국전파상 이렇게 4가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바지런한 엄마가 심어놓은 고추, 당근, 깻잎, 상추 등이 뒤뜰에서 자라고 있었고
집안 군데 군데 단감나무며 떨감나무며 각종 꽃나무들이 철마다 색을 바꾸곤 했었다.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대추가 열리는 대추나무도 있긴 했는데,
단것에 환장했던 아이들도
그 대추나무에서 열리는 대추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추나무 바로 뒤에 변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 아늑하고 구수한 냄새가 났던 변소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검은 기와를 얹은 변소.
그것은 앞, 옆, 뒤로 돌을 심은 흙으로 벽을 바르고,
사방으로 나무테를 두른 양철문을 달아
변소로서 꽤 훌륭한 왜관을 갖췄었다.
 슬레트 지붕에 가마니 거적때기로 문을 대신한 시골변소하고는 격이 달랐다.

변소 안도 꽤 넓었다.

널찍한 똥통 하나와 오줌통 하나를 제하고도 앞 옆으로 공간이 꽤 많았으니 최소 두평은 되었으리라. 똥통과 오줌통 위로는 혹시나 나무가 썩거나 부실해 밑으로 빠질까 하는 염려는 붙들어 매도 좋을 만치 두툼하고 튼튼한 나무발판이 놓여져 있었다.

어린 나는 이 변소에 앉아 종종 상상하곤 했다.

여기 두 개의 똥 오줌통이 없다면 여길 내 집으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맨 왼쪽으로는 시멘트를 무릎높이로 발라 침대 겸 방으로 사용하고,
그 옆에 조그만 찬장을,
찬장 위엔 개나리 소반을 걸어두고,
찬장 옆엔 석유곤로를 놓는다.
그 맞은 편에 8절지 도화지 두어배쯤 되는 창문을 하나 달아
대추나무 크는 것을 관찰하자.
창문 밑으로 책꽂이와 안은뱅이 책상을 두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이러면 아담한 내 집 꾸미기가 끝나는 것이다.

때때로,
상상속의 창문에 구멍뚫은 창호지를 발라야 할지 그냥 둬야할지를 고민하기도 하고,
끼니때가 되면 석유곤로에 불을 지펴 시래기국 끓여먹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내가 똥통위에 앉아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우리 아버지 똥씹은 인상을 하시곤
내게 이렇게 타일렀을 것이다. 

‘앞으론 이런 똥간에다 집지을 궁리는 하지 말아라.
어린이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하느니라.‘

어쨌든 나는 이 구수한 냄새나는 변소에서
우리집 앞 형제시계방 맏딸 박덕선이와
앞뒤로 함께 앉아 똥오줌을 누기도 했다.
똥오줌을 누면서 함께 노래부르기도 했다.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기쁜일 슬픈일 모두 내일처럼 여기자.
서로서로 도와가며 한집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다안군의 자손이다.‘

우리집 똥통은 자주 가득찼다.

우리집에 사는 사람만 해도 총 4가족 22명에다
동네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죄다 우리집에 와서 하루종일 놀고 갔으니...
걔네들이 싸지르는 똥오줌 또한 무시못할 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 똥푸는 날이 자주 다가왔다.

똥푸는 날엔 파란 탱크로리 똥차가 와서 우리집 대문 앞에 차를 대놓고
구불텅한 호수로 덜덜덜 하고 똥을 퍼갔다.
똥을 푸고 나면,
빨간 고무장갑을 낀 똥차 아저씨
한 양동이 물을 똥통과 나무발판에 쫙 끼얹어 깨끗이 씻어주고 가셨다.
다시 깔끔해진 똥통.
나는 그 빈 똥통을 들여다 보며 그 깊이를 가늠하곤 했었다.

‘내가 혹시 저기 빠지더라도 폴짝 뛰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렇게 자주 똥을 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변소인심 하나만은 후덕했다.

길건너 버스 정류소에 20원을 내면 볼일을 볼 수 있는 공공화장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날이면 수도없이 장꾼들이 스리슬쩍 우리집에서 볼일을 보고갔다.
하지만 우리집 식구들 중 누구도 싫은 내색을 비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집 추레한 나무대문은 누구에게나 늘 열려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고3이 되면서 그 마당넓은 집이 팔렸다.
그리고 그 위로 우리집 변소도,
 4식구가 살았던 집도 다 갈아 엎어지고
농협이 들어섰다.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커서 그 변소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면
 그곳이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
그 변소간에다 집을 지을만큼 아늑하게 느껴졌을까 하고.

아쉽게도 우리집 변소사진은 한 장도 안남아 있다.

그게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