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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고돌이단


BY 불토끼 2006-05-16



고돌이. 그러니까 원래이름 고스톱.
그것은 우리 식구들에 있어 일종의 종합스포츠다. 왜 종합스포츠인가 하면, 우리 식구들은 손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화투를 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아버지. 아예 화투중계를 하신다. 우리들의 화투판에 봉사가 있어도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일 정도로 아버지의 입담이 좋다. 세상에는 많은 스포츠 중계가 있다. 올림픽 스포츠 종목은 두고서라도 당구, 소싸움, 개 높이뛰기, 서양카드중계 등의 희안얄랑한 스포츠들... 고돌이도 이런 틈에 끼어 텔레비전으로 중계가 되었다면 우리 아버지는 일찌감치 화투중계사로 이름을 날리셨을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우리 오빠 역시 화투칠 때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집 애들이 주로 외가쪽을 닮아 근육이 좋고 머리가 큰 편인데 우리 오빠의 팔뚝은 그 큰머리의 딱 반이다. 그 굵은 팔로 담요때기가 떨어져 나가라 온 힘을 실어 화투패를 내려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오빠다.

마지막으로 나. 성질이 급한 나는 쓰리고에 피박 뒤집어 쓰면 아주 몸부림을 치며 환장을 한다. 이런 고로 60이 넘어선 되도록 고돌이를 삼가려고 한다. 심장에 무리가 갈까봐.

우리 형제간이 이렇게 화투에 도가 트게된 것은 다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요참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찍이새마을 운동에 앞장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흘리며 산등성이에 과일나무를 심었으며 그러다 밀양 박씨 처자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은 촌사람. 간혹 시장통 고추전 앞 간판없는 대폿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불콰해서 들어오긴 해도 술낌에 살림을 때려부신 적도, 술낌에 마누라 자식 팬 적 한번도 없다. 오히려 술만 취하면 기분이 좋아져 늘 고정넘버인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을 부르며 들어와 자식들을 불러 앉혀놓고는 일장 연설을 한바탕 하시는 양반.

그 시절 아버지는 막내 삼촌이 월남갔다 돌아오면서 들고온 국방색 담요를 복판방에 딱 펴놓고 우리들에게 화투를 가르쳐 주셨다.

알록달록 예쁘기도한 화투장을 가지고 놀다가 머리가 굵어지면서 민화투를 배웠고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어깨너머로 고돌이를 배웠다. 아버지를 위시하여 맏딸과 장남으로 구성된 고돌이단이 제대로 형성될 무렵 조직이 치명타를 맞았다. 중3이 되면서 물상선생님을 짝사랑하게 된 맏딸 우리언니가 콧방귀를 팽 뀌며 고돌이단을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열쇠를 채워둔 예쁜 공책에 시나 일기 나부랭이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셋째인 내게 허락하셨다.

‘쪽수가 모자라니 너도 오늘부터 고돌이패에 끼도록 하거라’

처음에 나는 모양이 비슷한 패를 모으는 일에만 정심이 팔려 있었는데 차츰 남이 딴 패를 보면서 설사와 따닥(다른 지방에는 없을 수도 있음)을 예감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마지막에 가서는 누가 어떤 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 예견하는 등 놀라운 소질을 보이게 되었다.

어릴 때는 고돌이에 대한 놀라운 소질을 보이면서 명절 어른들의 고돌이판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나 나의 고돌이에 대한 애정은 대학시절에 이르면서부터 고난에 봉착하게 된다.

대학때. 그때는 우리 4형제가 모두 대구에서 학교엘 다니면서 단체로 자취를 할 때였는데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당장 담요를 깔았다. 이때 조차 언니는 우리 형제 고돌이단에 끼기를 거부했다. 중학교때부터 물상 선생님을 짝사랑하여 싹수를 보이더니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재수학원에서 만난 재수생이랑 연애를 시작하여 대학생이 되자마자 늘 연애를 하느라 집에 붙어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애인없는 우리 오빠,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단출하게 판을 벌였다.

그 시절 고돌이를 치다보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말이지 프로답지 않은 행동인데, 쓰리고에 피박쓸 기미가 보이면 자주 요때기를 들어 엎는 것. 그렇게 들어 엎고는 급한 김에 방문을 열고 맨발로 대문쪽으로 도망간다. 하지만 몇미터 못가 뒤에서 날아오는 오빠의 슬리퍼에 맞아 고꾸라지기가 일쑤다.

아! 결코 잊을 수 없는 오빠의 갈색 슬리퍼. 그것은 빳빳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밑에 얼기설기 구멍이 뚫렸는데 군대에서 무좀에 걸려 돌아온 오빠가 발씻을 때 쓰던 것이었다. 그 슬리퍼는 밑바닥이 아주 딱딱하여 그것으로 등짝을 한번 맞으면 등짝에 슬리퍼 밑바닥 무늬가 벌겋게 새겨질 정도였다.

지금은 우리 형제 고돌이단이 모두 결혼하여 엄마 아빠가 되었다. 한창때 연애에 힘쓰던 우리 언니. 지금은 40이 넘어 옛날의 새초롬함이 다 사라지고 완전 아줌마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고돌이단에 끼고 싶어하는데 사실 언니가 끼면 판이 확 깬다. 패를 내미는 걸 보면 옛날에 아버지에게 정통으로 교육받지 않은 티가 여실히 나타난다. 게다가 한창때 연애할 때 언니의 고 발칙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점 10원을 쳐도, 점 100원을 쳐도, 잃어도 흥, 따도 흥이다. 이런 사람이 고돌이 판의 흥을 다 깬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한테 돈을 따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나? 요즘 좀 심심하다. 엄마가 독일로 화투를 부쳐주셨지만 같이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우리 남편(그간 어찌어찌하여 독일와서 독일남자랑 살고 있음)과 친구(중국계 독일여자)를 꼬셔서 오랜만에 화투판을 벌려본 적도 있었다. 근데 이건 애랑 화투를 치는 것도 아니고 한시간을 넘게 가르쳐줘도 잘 모른다. 국화와 목단을 구별하지 못하고 흑싸리와 빨각사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솔과 비를 헷깔린다. 제대로 아는 건 똥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싸놓은 걸 가져가면서 지네들이 모아둔 피 한 장씩 가져갈라 치면 사기를 친다는 거다. 나원 참...
 아무래도 이 사람들과 고돌이를 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옛날에 삼촌이 월남에서 가져오신 국방색 담요를 펴놓고 성냥개비를 돈이라고 치고 고돌이 치던 그 맛! 이곳 독일에선 더 이상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내가 여기와서 살면서 울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이게 제일 울적하다.

울적하다...

아참, 우리 아버지를 잊었다. 그 양반은 자식들 다 객지로 보낸 후 마을 고돌이단을 조직하시어 여적지 고돌이를 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