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이웃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전라도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형님들께 갑작스레 웬일이냐고 묻었다.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그렇게 됐다고 설명해 주셨다.
왜 갑자기 배가 아팠을까... 그동안 많이 좋아 지셨는지 알았는데... 조문객들에게 먹을 음식들을 나르다 빈소를 보았다. 사진 속 형님의 눈과 마주쳤다. 급하게 만들었을 영정사진이겠지만 그렇게도 사진이 없었을까... 눈동자가 날카롭게 흘겨보는 그것에 다시 한 번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든지 화장터로 가든지 결정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려간 날부터 장례 예복도 아닌 보통의 점퍼 차림으로 나다니는 사람들이 몇이 있었다. 식구들의 분위기도 좀 이상했다.
3째 형님이 내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4째 형님은 몸에 이상이 생겨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한 거란다. 음독자살...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형사라는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뛰어노는 초등학교 3학년인 조카 다혜까지 불러서 조사를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형님이 택시를 불러서 읍내로 나가 농약을 사셨고 그것을 빨대를 사용해서 마셨단다. 그리고 빈 병을 딸인 다혜를 시켜서 재활용 모아 두는 곳에 깊숙이 넣어 놓으라고 했단다. 형님은 그리고 쓰러져서 바닥을 기고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는데 이웃에 살고 있는 아줌마가 그 모습을 보고 병원으로 데리고 왔단다. 형님은 하루가 조금 지나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셨단다.
앞도 잘 보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읍내로 택시타고 나가서 약을 사실 생각을 했을지.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식구들도 형님이 약을 드셨는지 몰랐단다. 병원에서 진단을 보고 알았다니 상처보다 배신감이 큰 듯했다. 형님의 친정 식구들이 왔고 분위기는 고요함 속에서도 살벌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형님은 죽음을 맞고도 평생 들어도 못다 들을 욕을 들어야 했다. 아무도 형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님이야 자식의 앞날에 먹칠을 한 며느리가 야속하다 할지라도, 시숙님 역시 평생 씻지 못할 허물로 남을 그 일이 야속해서 그런다 치더라도 같은 여자들만큼은 이해를 해줘야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의 집 불구경하듯 죽어도 곱게 죽지 못했다며 속삭거리는 얘기들은 흉뿐이었다.
“형님의 선택이 잘못 됐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심정이 오죽했으면 그런 독한 방법을 택했을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안돼요?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더니... 형님은 생때같은 자식 남겨두고 떠나는 그 길이 편하기만 했겠냐구요. 우리라도 그냥 가만히 있어 주자 구요.”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에 속이야 어땠을지 모르지만, 뒤에서 덤으로 나까지 욕을 해댔을지도 모르지만, 내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형님을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혜는 그렇게 엄마를 잃었다. 상복을 입혀줘도, 사람들이 침통하게 있어도, 자신을 불쌍하다고 쓰다듬어 줘도...그렇게 천연덕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시댁에 내려가면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아이의 옷을 사게 됐다. 잠을 자더라도 내 새끼들과 함께 데리고 자게 되었다. 불쌍하고 가엽은 그것이 안됐어서 내가 품에 안고 자기도 했다.
그곳에 다녀온 지 얼마나 됐을까? 내 머리가 몹시도 가려웠다. 딸 아영이도 가려운지 박박 긁어 댔다. 난 내 머리에 새치가 더 늘어나려나보다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영이 역시 땀을 많이 흘리니 그런가보다고 감겨주기만 했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머릿니를 본 것이다. 기암할 일이었다. 때가 어느 땐데 머리에 이가 있다니... 어디서 옮겼는지 몰랐다. 유치원에서 옮겼는지 알고 유치원으로 연락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니가 있는 애는 우리아이 하나뿐이라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아토피가 있는 딸의 피부를 생각해서 약도 뿌리지 못하고 몇날며칠을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야 했다.
어디서 옮긴 것일까? 혹시... 설마설마 하며 시간이 흘렀고 다시 시댁에 내려가던 날이었다. 새벽녘에 당도한 나는 가자마자 다헤의 머리를 들추어보았다.
세상에... 햐얗게 깔린 서캐(머릿니 알)하며 툭툭 털어보니 떨어지는 이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다들 기겁을 하고 소름이 돋는다며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나는 자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머리를 감기고 밤이 새도록 그것들을 잡아냈지만 숱이 워낙 많아서 쉽지 않았다. 이틀 있는 동안 약을 하고 잡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방학기간 중이라 서울로 데리고 올라왔다.
다혜는 심한 사시다. 거기다 한쪽 눈은 심각한 난시와 근시를 갖고 있어서 사물을 분간하기도 힘겨워했다. 나머지 눈도 점점 시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숙님이 하나뿐인 딸을 너무나 방치하는 것이 아닌지 속상했다. 형님이 살아 계셨을 때 병원을 다니며 알아봤다고 했지만 점점 의학이 발달하고 있는데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 것이 너무 무책임하게 보였다. 그래서 다혜를 데리고 올라 온 김에 안과 전문 병원을 데리고 갔다.
결론은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실망하는 내게 덕망 있는 의사라며 어느 분을 추천해주셨다. 소견서까지 받았다.
하지만 추천받은 의사를 만나보지 못했다. 시숙님은 다시 실망하기 싫다고 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이...
엄마를 잃고도 뛰어 놀던 철부지 꼬맹이가 벌써 중학교 2학년의 꼬마 숙녀가 되었다. 방학이면 어떻게든 나에게로 오고 싶어 하는 다혜는 틈틈이 제 엄마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묻곤 한다.
아주 어릴 때 서울서 자신이 살던 집의 구조를 얘기 할 때는 신기하기도 하다. 형님에 대해 묻는 말에 나는 좋은 추억으로 남을 얘기들을 해준다.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도 다혜는 자신의 엄마가 어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만은 묻지 않는다. 묻는다면 어찌 대답해줘야 할지 난감했을 텐데...다행이다. 어쩌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다혜의 힘겨울 사춘기가 나는 걱정스럽다. 내가 갖고 살았던 고민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아픔을 갖고 비관하게 될지 모를 내 조카가 난 너무나 안쓰럽다. 새엄마가 들어오고 처음엔 아버지를 뺏겼다는 상실감에 신경질적이던 아이가 점점 그 생활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다행이라고도 여겨진다.
새로 들어오신 분께 나는 아직 한 번도 형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냥 호칭 없이 경어를 쓰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아직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으니 아직은 내 형님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다혜의 새엄마, 좋으신 분 같다. 다들 ‘동서’ ‘형님’ ‘언니’ ‘제수씨’ ‘형수님’ 하고 부르니 나도 조만간에는 ‘형님’ 하고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천사처럼 예쁜 마음을 가져서 4째 형님과 다혜에게 살갑게 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형님의 모습에서, 다혜의 모습에서 차마 겉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아파하던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란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형님은 바보처럼 그렇게 세상을 버리셨다. 지금까지 누구하나 그 죽음을 가엽게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나의 조카의 앞날이 안타깝다. 내가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언젠가 [인간시대]에 조카의 얘기를 소재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방송을 통해서 사연이 공개되면 주변의 관심 속에 어쩌면 좋은 일도 생길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지만 시숙님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허사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것도 참으로 안타깝다.
어버이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가 다혜와 통화를 했다.
“작은 엄마, 왜 전화 자주 안하세요?”
“그러는 너는 왜 안 해.”
“헤헤헤...”
어머님이 계시던 시숙님이 계시던 난 다혜에게 잘해주다가도 잘못 된 점이 있으면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하지만 다혜의 새엄마가 들어오고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나설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다혜가 새엄마와 마음을 잘 맞춰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나는 건강했을 당시의 4째 형님이 그립다. 어제 일도 쉬이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갖고 있는 내가 10년도 훨씬 지난 옛 일이 어렇듯 선명할 수가 있다니...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