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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나서...


BY 능소니 2006-05-02

4월의 마지막 날, 우리가족은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이제 휴일을 맞았습니다.

어느집에나 한번씩 찾아오는 \"노인문제\"였습니다.

시골에 홀로 계시던 시어머니가 아프시다고 다리를 못 쓰신다며 대학병원에 입원한건 작년 12월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우리아이들이 둘이나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나는 갈 수도 없었고, 시모 생신때도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모가 퇴원해서 큰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설날에 가서 뵙는게 고작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시모와 함께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온 우리는 그동안 겪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난 게 그저 고맙고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멀리 이사나온 후 시어머니한테 가장 시달린 건 첫째 시누이였습니다.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새벽이나, 밤이나, 낮이나 상관없이 시어머니의 호출에 달려가야 했고, 병원에 갈때마다 돈도 많이 쓰고 정신적으로도 가장 많이 시달렸습니다.

그런걸 알고 있었지만, 우리도 벌어 먹고 살아야 했고, 사실 그동안 너무 많이 시달린 탓에 모른척 하고 그냥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픈 시어머니는 큰집에서도 오래 계시지 못하고 그 아픈 몸을 이끌고 결국 손주를 들들 볶아서 시골로 다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파트에 낮에 혼자 두고 다들 일 나가고 밤에만 얼굴 볼 수 있으니, 도저히 외롭고 무서워서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답답함을 못 참는 시어머니인지라 자꾸 기어서라도 밖으로만 나가려고 해서 큰형님은 문을 잠그고 일을 다녔다고 했습니다.

30여년을 큰며느리밖에 없다고 떠받들고 살던 시어머니의 입에서, 이제는 죽어도 큰아들한테 안간다는 소리가 나오고, 막내아들 한번 보고 죽으면 한이나 없겠다며 매일 우리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함께 살기도 했었고, 이제 병든 몸으로 막내만 찾으시는 시어머니를 모른척 할 수 없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우리집에 오시자마자 울기 시작해서 매일을 신세한탄 하며 울고, 밤에 잠도 안자고 울거나 자는 사람 깨워서 얘기하거나 가끔 정신을 놓기도 했습니다.

곧 돌아가실까 두려워 남편과 번갈아 밤을 지키며 시어머니를 보살폈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자며 그래도 제 마음을 다독이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듣기 싫은건 밤낮으로 우는 소리였습니다.

원래 젊을때부터 울기 좋아해서 무슨 말만 하면 울기는 했지만, 밤에도 잠도 안자고 울어대니 도저히 아이들이나 저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돌이 막 지난 우리 막내도 엄마가 밤새 할머니한테 시달리느라 제 옆에 안자니까 덩달아 엄마 찾아다니느라 잠을 못자고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후, 막내가 소변도 일찍 가리고 영특하던 아이인데 갑자기 하루종일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소아과에 데리고 갔더니, 정서불안 같다며 신경을 좀 쓰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지금 중2인 우리 큰딸도 시어머니때문에 정신적 불안까지 왔었거든요.

그당시에도 울 시어머니는 낮에 하루종일 내 뒤를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해대는 것도 모자라, 부부가 자는 방문을 새벽 1~2시면 두드려 열고 문턱에 주저앉아 아침이 올때까지 떠들어 대곤 했었습니다.

그 소리에 아이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달려서 학교 선생님이 불러서 학교에 갔더니, 아이를 한번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면서 또다시 막내까지 그 지경을 만들까 싶어서 안되겠다는 생각에 가까이 사는 막내시누이한테 말을 했습니다.

 

막내 시누이 역시 시모를 모시고 있으면서 친정엄마가 가까이 와 있으니까 신경을 쓰고 했더니 그 시어머니한테 굉장히 시달리고 있던 지경이었습니다.

매일 한의원에 침 맞으로 다니는 택시비와 병원비를 시누이가 거의 내고 있었거든요.

그 일로 시누이의 시어머니는 토라져서 며느리를 있는대로 볶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님, 도저히 시어머니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저도 제 아이들 살려야 하니까 어떻게든 형제들을 모아 해결책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밤새 잠도 안자고 시달리니까 저도 체력에 한계를 느끼네요.\"

하고 말했더니 우리 시누이는 난리가 났습니다.

하는거 봐서 시어머니 잘 모시고 있으면 지금 시누이 소유의 주택이나 둘째시숙 소유의 빌라를 싼 값에 세를 주려고 했는데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그 소리냐며 저를 천하에 나쁜 며느리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난 근처에 시숙집이나 시누이집이 그렇게 있어도 욕심 낸적도 없거니와 형제들 집은 아무리 싼 값에 준다고 해도 들어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누이는 혼자서 다 궁리를 하고 시어머니를 완전히 나한테 맡기기로 결정을 지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너무 미워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싶다는 생각조차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시누이는 내 생각이 정말 그렇다는걸 다시 확인한후 본인이 직접 형제들을 소집했습니다.

시누이남편은 한 술 더 떠서,  내가 시어머니 모시고 있으면 한달에 책임지고 백만원씩을 걷어서 줄테니까 모시라고 했습니다.

집도 싸게 세 주고, 빚도 어느정도 형제들 돈을 모아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부다 싫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담보로 흥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가 앞으로 몇 년을 살지 모르는데 제 젊은 시절을 그 돈으로 잡혀서 보내기도 싫었습니다.

처음에,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모시자는 생각은 다 없어지고, 시누이와 시누이남편의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절대 시어머니 모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집이 제일 편하다며 계속 있고 싶어하는 시어머니를 보면 불쌍한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들 넷 뒷수발에다, 낮에는 가게 나가서 일도 해야 하고, 시어머니 대소변 수발 다 들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밤으로 잠도 못자며 우는 소리, 하소연을 들어주기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그 모든것이 한꺼번에 내 어깨를 짖누르며 결국 나는 병이나고 말았습니다.

 

지난주 토요일밤에 결국 여섯남매가 다 모였습니다.

시어머니는 그 이틀전에 서울에 있는 둘째아들네로 옮긴 뒤였습니다.

내가 병이 나서 누우니 돌볼 사람이 없었고 아이들조차 힘들어서 전부 병원을 다닌 뒤라, 시숙이 와서 보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형제들간에 싸움이나 날까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큰 싸움은 나지 않고, 큰형님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시골에 시어머니 살고 계신 집과 조그만 수퍼, 땅은 전부 둘째 시숙 앞으로 되어있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큰시숙은 이미 가정과 집이 있다며 논 다섯마지기를 상속으로 주셨고,

막내아들인 남편은 공부를 더 한다고 해서 대학원까지 공부시켜 주고 돈 몇천만원 주는 걸로 상속을 마쳤고,

나머지 땅과 집은 전부 둘째 시숙앞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아버님 생각에는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큰형님은 그게 서운했던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이 그 집과 집터를 가지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둘째 시숙 입장에서는 그 땅을 내놓던가 아니면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생각을 했는지, 둘째형님이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둘째형님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일반 학교가 아닌 사회복지시설이어서, 아기부터 노인들까지 전부 수용하는 학교 였습니다.

그곳에 시어머니를 입학을 시키고, 낮동안 학교에서 보살펴 주고, 밤에는 함께 퇴근을 해서 집에서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행인건, 시어머니가 둘째며느리는 들볶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결혼할때부터 그 며느리는 어려워서 시어머니가 편하게 대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들은 농고졸업이 전부인데 둘째며느리는 대학원졸업에다, 학교 선생에다, 친정아버지는 서예가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고 집안도 좋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들이 딸리니까 그 며느리는 어려워했었습니다.

그집에는 그래서 가기 싫다고 했었는데, 막상 가니까 어려워서 밤에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잠 못자더라도 혼자 지새우고 두 부부 자는 방에 가서 깨우지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는 함께 살아서인지 편하고 만만해서 막 대하면서도 그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둘째며느리는 어려워서 그렇게 생활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막내시누이는 그게 잘됐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성질이 좀 꺾이기도 하고 참을성도 길러지고 오히려 어려운 며느리 만나서 기죽이고 살면 잘된 일이라며 좋아했습니다.

큰형님이나 나나, 사실 시어머니의 성격을 알기때문에 둘째형님이 당할 고통이 뻔히 보입니다. 지금은 어려운 며느리라고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갈지.......

우리의 걱정을 듣고 둘째형님은, 그래도 말을 좋게 합니다.

\"여태껏 큰형님은 30년을 고생을 하셨고, 동서도 시어머니한테 너무 시달리고 고생을 했지만, 나는 아무고생도 안하고 살았으니까 이제 내 차례라 생각하고 내가 책임을 질께.\"

그렇게 말하니까 그동안 둘째형님한테 서운했던것까지 다 눈녹듯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토록 이기적인가봐요.

다행히, 둘째형님이 학교에서 꽤나 끝발(?)이 있어서, 학교 차 기사님이 시어머니 한의원 모시고 다니고, 집에까지 출퇴근을 함께 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째형님은 밤에 잘때만 데리고 자면 된다며 안심하라고 해서 다들 그렇게 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낮동안 시설 원비와 병원비 들어가는건 형제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아서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꼬박꼬박 20만원씩을 내놓아야 되지만, 없는 우리형편에 사실 시어머니가 와 있으면 그돈도 더 들어간다 생각하니까 그게 제일 현명한 것 같습니다.

다들 의견일치를 보고 일요일날 헤어졌는데, 나는 그길로 집에 돌아와 다음날 아침까지 깨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동안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이 마무리 질때까지만 참자며 이를 악물고 참고, 막내라 할 수 없이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심부름을 했더니 결국 자리에 눕고 만 것이었습니다.

밤에 찾아간 응급실에서 입원을 하라고 했지만, 아이들 넷 두고 입원을 할 수가 없어 억지로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앓았습니다.

 

큰 결정 내려준 울 둘째형님이 고맙고, 시어머니 한 20일 모셨다고 덜컥 병 나서 누운 내가 참 못나보이고, 역시 내 그릇은 이것밖에 안되는가 싶어 씁쓸합니다.

일이 시원하게 해결되긴 했지만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은건 왜일까요?

나도 나이먹어 시어머니처럼 될지 모르는데.........그냥 아무소리없이 내가 모셨어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