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티켓이 두 장 생겼다며 같이 가잔다. 몸만 나오면 된다는 말에 약속을 했다. 요즘 연극계가 초대권 남발로 재정이 바닥이라는데 내가 그에 일조를 하는 격이지만 사실,공짜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 몇 있을까.
솔직히 나는 공짜든 아니든 연극을 관람한 적이 없다. 마당 놀이는 한 번은 초대권이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친구를 건내줬고 한 번은 돈 내고 표 사서 구경했고 악극도 한 번 봤는데 역시 초대권으로 갔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연극 구경을 하게 되었다.
저녁에 문화 생활을 하러 갈 것이니 저녁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온 식구들에게 고했다. 아이들은 저녁 약속이 있으니 밥 걱정 말라고 그러고 남편은 챙겨 놓고 가면 먹는 일은 혼자 하겠다고 했다.
시간은 저녁 7시 30분, 좌석은 가서 배정 받으면 되니 먼저 가서 처리 해 놓을테니 7시 10분까지 오란다. 차려 놓은 밥상에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겠다. 일찌거니 저녁을 해서 먹고 남편 밥상을 봐서 밥상보로 덮어 놓고 얌전하게 메모까지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동네에서 제일 말 많은 여자를 통로 입구에서 만났다. 저녁 밥 지을 시간인데 뭔 일로 어슬렁 거리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팔짱을 낀 폼이 바빠 보이지도 않고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도 않은 것이 그야말로 슬슬 콧바람 쐬러 나온 폼이다. 어디 가냐고 묻지 않을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답을 말 할 나도 아니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자 머리 모양이 예쁘다며 괜히 친한 척 밉지 않은 말을 내 뒤꼭지에 대고 주절거린다. 말은 많지만 듣기 싫은 말이 아니라서 봐 주기로 하고 다음 대답은 생략해 버렸다.
관리실 앞을 지나자 관리인 아저씨께서 또 말을 거신다. 다 저녁에 집을 나가는 내가 의아한 모양이다. 시장을 가는 것 같지는 않고,학교 운동장에 뜀박질 하러 가는 것은 더 아닌 것 같아 보인다는 눈으로 쳐다보신다. 혼자 하는 저녁 외출은 이렇듯 자유롭지 못하다.
약속 장소에 10여분 일찍 도착을 했다. 대학로의 저녁 7시는 무척 붐볐다. 굳이 시간을 기다릴 것 없어 전화를 걸었다. \'언니~잠깐 기다려요.문제가 좀 생겼어요.가서 얘기할게~\' \'이게 뭔 소리여?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이여. 연극 보는데 시험을 치르는겨? 어려운 문젠겨?\'
연극표 두 장을 얻었다고 했다. 초대권으로 알았고 예약을 할 때도 그렇게 알았단다. 좌석 배정을 받으러 갔더니 30% 할인권이라고 하더란다. 25000원 짜리 연극을 17500원에 볼 수 있는 표라는 것이다. 문제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생각이 달라졌다. 대학로에는 연극을 하는 소극장이 많다. 골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 극장의 그 연극을 봐야 될 이유가 없지 않냐는 아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초대권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즐겨 보려는 문화 생활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어떻게 할겨? 나온 김에 한 편 보고 갈까?난 연극 한 번도 못 봤는데..\' 대부분 연극 시간이 저녁엔 7시 30분인데 다른 극을 알아볼 시간도 선택할 시간도 여유롭지 않았다. \'공짜라는 헛물을 켠 값을 치뤘다 생각하고 앞으로는 초대권이 아닌 정식권(?)을 사서 우리도 멋진 연극에 취해 보자구.\'
연극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하루가 부풀어 있었던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였었나 보다. 전에 없이 화사한 화장까지 하고 잘 신지도 않던 구두를 꺼내신고 딸래미 가방을 몰래 챙겨 들고 나간 내 모습이나 입술에 반짝이 섞인 립스틱을 곱게 칠한 그녀의 모습도 꽤나 신경 쓰고 나온 티가 역력했으니까...
\'다음에 기회 되면...\' 쉽지 않을 것 같은 약속을 뒤로 하고 허망한 발길을 돌려 각각 다른 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교통카드를 갖다 대니 [환승입니다] 한다. 설레이고 엇갈리는데 걸린 시간이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관리실 아저씨가 교대 근무에 들어가셨는지 나갈 때 앉아 계시던 분이 아니었다. 목례를 하고 손 뻗으니 닿는 곳에 탐스러이 달린 라일락 한 덩어리를 코에 갖다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코 속을 후벼 파는 듯한 향내가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열쇠 구멍을 비틀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려놓은 밥상이 그대로 였다. 남편은 탁구 동아리에서 한참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모양이다. 옷을 벗기 전에 거울 앞에 서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방을 얼른 제 자리에 비워 놓고 푸덕푸덕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했다.
\'어~일찍 왔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 \'그렇다고 그냥 왔냐?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오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아둔한 여자. 말은 쉽게 하지만 헛탕치고 돌아온 여자가 속상해 보였나. \'그냥 오지 않으면 어쩌냐. 저녁도 먹고 갔지,기분은 꾸리하지,공짜 너무 좋아한 탓이지 뭐..\'
아이들이 들어왔다. \'엄마 연극 잘 봤어?\' \'느그 엄마 그냥 왔단다.\' \'왜에?\' \'이러구 저러구 그러잖냐..그래서 그냥 왔지.\' 아이구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쩌누.. 하는 눈이다. \'저녁이라도 맛있는 거 먹고...다른 거라도 보고 오지 그랬어.\'
그래. 다른 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그 고상한 문화생활, 내게는 아직 먼 생활인가봐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