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 참으로 많다. 4살 때쯤, 며칠 친 할머니 댁에 맡겨졌던 나는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족보로 따지자면 나의 삼촌이다) 때문에 허리를 다쳤드랬다.
빠듯한 살림에 부모님은 딸이 다친 줄도 모르고 매일 울어 댄다고 구박했단다. 후에 고열이 나고 졸도한 딸을 안고 읍내에서 소도시로, 거기서도 대도시 대학 병원에 갔을 때야 비로소 척추가 심하게 썩어 가고 있으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단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 능력이 남의 배를 타고 입에 풀칠하기에만 전전긍긍 하던 때였단다. 그러니 큰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는 큰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에게 병원의 문턱은 높다.)
“수술만 해주면 돈은 조금씩 갚아 나가겠습니다....”
하고 사정하며 울고 매달렸을 부모님의 손을 병원에선 냉정하게 뿌리쳤단다.
친척 누군가의 소개와 보증으로 작은 종합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신 부모님은 또 다른 벽에 부딪쳐야 했단다.
의사 말씀이,
“저희 병원의 능력으로는 아이의 목숨은 구할 수 있겠지만... 불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생각 잘 하십시오. ”
하셨단다.
참으로 무섭고도, 간단한 의사의 말이었을 것이다.
‘하겠다’ ‘안 하겠다’ 중에 하나만 고르라는 간단 + 난해한 객관식 문제를 내주신 의사의 말대로 부모님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하셨단다.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옷에 장화조차 벗어 던지지 못한 모양새로... 그 몸에서 얼마나 많은 비린내가 나는지, 그래서 주위 사람의 코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다.
사람이 죽기 1초 안에 수천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식의 생사 앞에서 내 부모님들의 생각이 얼마나 많고 복잡했을지 난 지금 ‘감히’ 짐작조차 할 수 도 없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분분했단다.
아버지의 생각,
‘ 계집애가 병신 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둬.’
엄마의 생각,
‘ 병신이 되더라도 내 새끼 죽는 꼴은 못 봐요. ’
엄마의 고집 앞에 아버지는 “ 네 마음대로 해. ” 하셨단다. 남자들이란 조금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와는 상관없이 지금부터 하는 일은 모두 네 책임이야’라는 식으로 한발을 뒤로 빼는 수법들을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마음대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염려 했듯이 등이 굽는 곱사의 모습으로 계집애가 병신이 되어가고 있었단다.
그것을 빌미로 아빠는 노름을 하셨고 술을 드셨다는 풍문(?)이 있다. 참말로... 내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참아야 했을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7살이 되도록 난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신데렐라나 콩쥐 팥쥐에 나오는 새어머니처럼 눈물이 쏙 빠지도록 구박을 해댔다. 심부름도 잘 시켰다. 자꾸만 무릎을 손으로 집고 구부정하게 걷는 나에게 똑바로 걸으라며 꾸짖어 대셨다.
후에 나는 무난하게 학교를 들어갔고 20원하는 차비를 아끼려고 4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받아쓰기 100점짜리를 가방에 넣고 걷고 있으면 힘든 줄도 몰랐다. 90점만 맞아도 얼굴색이 차갑게 변하는 엄마가 웃으며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난 자주 걷지는 않았다. 하지만 걷는 날이면 어김없이 중간도 못가서 걸어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리고 보면 난 엄마와 텔레파시가 잘 통한 듯하다. 어쩌면 엄마는 나에게만 통하는 천리안을 갖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갔더라면 길이 엇갈렸을 텐데, 한 번도 둘의 길이 어긋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엄마~~~!!!”
“뛰지마, 넘어져. 그냥 거기 서 있어. ”
달려오는 나를 향해 엄마는 더 빠른 속도를 내시곤 하셨다. 그리고 난 비린내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혔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엄마의 등이 늘 포근했다.
“엄마가 버스 타고 오랬잖아.”
“돈 아끼려고... 그럼 부자 되잖아. 그리고 나 또 100점 맞았어.”
“알어.”
“어떻게?”
“엄마는 안 봐도 다 알어. 하드 먹을래?”
싫다는 내게 엄마는 버스 값만큼 비싼 하드를 사주시곤 했다. 내가 입가로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엄마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한입도 베어 물지 않으셨다.
엄마는 내게 학교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며 원피스를 입히셨고, 고무신 신고 다니는 아이들 틈에서 검은색 구두, 빨간색 구두만을 신키셨다. 내 기억에 난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운동화를 신어본 기억조차 없다. 전교생 통 털어서 손목시계도 제일 먼저 차고 다닐 만큼 내게 신경 쓰셨다.
친구들은 잘 입고 다니는 나에게 우리 집이 의상실을 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렇게 엄마는 나를 키우셨다. 그리고 딸이 웬수같은 돈 때문에 큰 병원에서 버림받은 것이 한이 되어 지독하게 일하셨다.
지독한 엄마 때문에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 큰 배를 갖게 되었고 제일 먼저 흙벽돌로 지은 멋스런 집도 장만하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내 엄마에게는 참으로 많은 시련들이 있었다. 여자의 나약한 몸으로 그 모진 세월 눈물로 지새우며 우리 곁을, 나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던 거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20살이 넘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시 곧 죽게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난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독종이었다. 매일, 워낙 아픈 몸이라서 그렇거니... 혼자 참았다. 친구들 앞에서 누구보다 씩씩했고 앞으로 나서서 나를 들어내 보였다. 그리고 밤이면 온몸을 타고 오르는 마비로 인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쳐야 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병원에 갔을 때... 병원마다 손을 털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 4군데의 병원을 돌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찾아 간 것이 을지로 백병원.
내 몸 안에는 축구공처럼 커다란 종양이 2개나 있었단다. 어릴 때 했던 수술이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며 견뎌냈을 고통이 심했을 텐데 어떻게 버텼는지 대단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난 시험용 쥐처럼 침대에 눕혀졌었다.
20명에 가까운 인턴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과장 선생님이 잡은, 과장 섞지 않고 주사바늘만 20cm는 족히 넘는 그 무시무시한 것으로 배 이곳저곳을 후벼대는 아픔을 참아내야 했다.
특이한 환자는 의사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며 괜찮은 공부거리라는 것을 인턴들에 의해서 팔과 다리를 잡혀서 꼼짝 못하고 몸부림치며 알았다. 그리고 속으로 떠들었다.
‘ 내 팔자는 왜 이모냥이냐... 젠장... 다들 날 잘 갖고 놀다가 제자리만 갔다 줘요. ’ 하고...
난 내가 다시 수술을 받게 됐다고 했을 때 희망에 차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식구들 말이 허리를 곧게 펴는 수술을 받게 됐다고 했으니 왜 안 그랬겠나... 그래서 검사 차 받는 모든 검사들이 아팠지만 기꺼이 참아 낼 수 있는 힘을 줬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난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다.
20대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내 입에서 발악하듯...
“ 본인 동의 없이는 수술 할 수 없다면서, 난 수술하지 않아. 왜 거짓말 했어? 허리 쫙 핀다면서... 그렇게 말해놓고... 살짝 고정만 시킨다고? 그 짓을 왜해? 난 세상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냥 죽어 버릴 거야. ”
내 담당의사, 그때 무진장 진땀 흘리면서 날 설득하려 애썼고, 우리 엄마는 화장실서 울고 와서 눈이 퉁퉁 부어 있곤 했다.
그렇게 다들 애먹이고 버티던 내 마음이 언제 돌아 섰냐...면...
내 바로 아래 남동생, 2살 터울 아래 동생이 자기가 목표 삼는 대학에 가기 위해 제수라는 것을 하며 목숨을 걸고 있을 때였는데... 잘난 누나 덕에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며 배를 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술 안 받겠다고 버티는 딸 때문에 아버지가 우셨다는 소리를 동생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배타기 시작해서 누나 덕에 대학생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동생은 청와대 소속 경찰인 101단에 들어갔었다. 지금은 경복궁에서 근무하고 있다. 잎사귀가 4개인데...계급이름은 모른다. 그렇게 들었음에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난 혼란스런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고 두 달 동안 입원해서 2번의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내 부모님은 어릴 때 제대로 해주지 못한 한이라도 풀듯 그 비싼 수술비로 집 한 채 값은 버리셨을 것이다.
나의 당당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누구에게도 기죽고 싶지 않은 욕심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나의 겉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나의 기형적인 몸은 옷만 신경 써서 입으면 어느 정도 커버는 됐으니 말이다.
이런 몸임에도 불구하고 난 남자친구들도 꽤 있었다. 남편 역시 나를 따라 다니는 한 남자와 영화 속 장면처럼 결투 비슷한 것을 하기 직전까지 갔었으니 말이다.
내가 엄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한 남자와 줄행랑을 쳤을 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난 몰랐다. 내가 아이를 낳기 힘든 사람이란 것을... 그럼에도 내가 아이를 갖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엄마는 7개월에 배부른 딸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애만 떼자. 그 다음엔 네가 뭘 해도 상관 안할테니 집으로 들어와.”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그랬다. 여자로 태어나서 아기 하나 못 나으면 그건 살 값어치도 없다고... 난 고집껏 큰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았고 을지로 백병원이 발칵 뒤집어지도록 하혈을 했단다. 그래서 내가 깨어났을 때 피를 쏟은 것은 나인데도 불구하고 핏기 없는 엄마와 남편의 얼굴을 봐야만했다.
다신 둘째를 낳지 말라는 가족들의 성화에도 난 둘째까지 낳았다.
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들에게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할까봐 두려운 것 말고는...
큰아이, 작은 아이 둘 다, 내가 대중목욕탕을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다. 지금까지 난 수술자국 선명한 나의 희한한 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 앞에서 당당히 맞선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품앗이로 서로등도 밀자고 말한다. 혼자 와서 등을 밀지 못하는 노인 분들에게 다가가서 때도 밀어 드린다.
난 늘 이렇듯 내 자신과 싸움을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무도 다친다고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때, 사촌 오빠의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를 끌고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페달에 발도 못 올리고 초스피드로 내려오던 나다. 절벽 같은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여러 번. 끝내 그날 안에 자전거를 혼자 마스터 했던 끈기로 지금까지 살아 왔다.
살면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도 풀었다.
‘계집애가 병신 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둬.’ 하시던 아버지 나름대로의 사랑도 느낄 수 있는 세월을 먹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나란 것만 봐도 그리고 술 취하면,
“우리 딸은 외국으로 유학까지 보낼 거야. 공부 잘하면 박사 되고, 그림 잘 그리면 화가 되고... 똑똑한 우리 딸...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딸...”
하고 내게 만큼은 사랑 담긴 감정을 표현 했던 아버지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부인이자 자식들의 엄마란 것을 깨달고 사시는 아빠를 나 역시 최고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해석하기 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그래서 하고픈 말은,
주부들이여!!! 희망을 갖아라!!!
파란만장한 나의 삶이 하나둘 씩...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