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댁은 해남이다. 땅끝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핑계도 좋게 구정때 1번, 추석 때 1번... 추석 때 못가면 며칠 차이 안 나는 아버님 제사 때, 이렇게 2번 밖에 못 간다.
누가 그랬더라...시댁과 뒷간은 멀어야 좋다고... (난 내 맘대로 옛말을 바꿀 때가 많다. 말은 바른 말이지... 꼭, 처갓집과 뒷간만 멀라는 법은 없지 않냔 말이지...)
13년 전, 처음 시댁 갔을 때가 생각난다. 집안의 반대로 혼인 신고만 하고 살던 우리가 큰아이 갓난쟁이 때 추석을 앞두고 내려갔던 것 같다.
척북리라는 마을에서도 굽이굽이 길도 아닌 길로 남편이 한참 운전해 들어갔다. 시댁으로 첫나들이, 더군다나 조상님께 제를 지내기 위해서 내려가는 그날이 내 제사 날이 되는 줄 알았다.
남편은 곡예라도 하듯 좁을 비탈진 산길로 차를 몰고 올라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난 그때 무식을 용기 삼아 시댁이란 곳을 겁 없이 갔던 거다.
6남1녀 중에 5째인 남편, 그래서 시골에선 5남이라고 불리 우는 나의 남편이 살던 고향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난 좋은 며느리가 되겠다는 커다란 각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곧잘 하던 말이 있다.
“아빈아빠,(그땐 분명 남편의 이름에 ‘씨’자를 붙였는데...) 자기가 5째라도 난 어머니 모시고 살 수 있거든. 난 어머니랑 참 잘 지낼 자신 있어.” 라고...
참으로 개풀 뜯어 먹는(하긴, 요즘 개는 풀도 뜯어 먹는 다고 하던데...) 소리 + 개뿔 같은 소리인지도 모르고 씨부려 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다....
차에서 내린 나의 눈에 들어 온 시댁의 풍경은 이러했다.
지은지 오래 된 초가집은 흙벽이 떨어져서 속에 짚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다. 3명 누우면 딱 맞을 것 같은 작은 방 하나와 흙 아궁이가 있는 부엌엔 가스렌즈가 놓인 싱크대가 달랑 하나 있었다.
그 앞에는 수돗가, 그 초가집 바로 옆에 스레트 지붕의 시멘트 벽돌집이 있었다. 거기도 방이 1개, 연탄보일러가 있는, 하지만 잘 사용하는 것 같지 않은 부엌이 있었다.
그 옆에 푸세식 화장실, 그 바로 옆에 잡종의 피가 그다지 많이 섞이지 않았다는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 커다란 진돗개가 한 마리 있었다.
낙후된 환경은 꼭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 70년대 우리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뚝심하나 자부하던 나였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나는 무조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누가 누군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냥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 하세요!”
“워메... 이것이 누구다냐? 오남이 아녀...오남이 색씬감?”
“어여 오니라...”
..............
시끌시끌...쌸라 쌀라... 당께, 당께... 허벌라게....등등..도무지 나의 능력으로는 글로 옮길 수 없는 사투리 천국이었다.
내 앞에서 사투리 한번 쓰지 않던 아빈아빠 입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줄줄줄줄 흘러 나왔다. 이거야 원... 외국도 아닌 곳에서, 같은 민족임에 틀림없는 대도 불구하고 도통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누가 대한민국 땅덩어리를 좁다고 했는지...그건 분명 사기다. 이렇듯 언어의 장벽이 높다란 곳이 있을 줄이야... 난,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같은 외국어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어만 잘 알면 된다고 기죽지 않았다. 하지만 난... 한국어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난 대충 눈치로 때려잡아 웃을 때 웃었고, 어림잡아 조용했다. 그야말로 아이큐 두 자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난 시댁 방문 첫 날부터 초급눈치 8급의 수준으로 바쁘게 눈알을 굴려야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동네 분들이 다들 가시고 남아있는 식구들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다. 아빈이가 젖을 몇 번 빨다가 잠이 들었기에 얼른 스레트지붕이 있는 방에 아이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64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주름진 얼굴에 구부정한 허리. 어머님은 70세도 훨씬 더 들어 보였다. 그런 어머니께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김치를 버무리셨다.
[30대의 그 한창 나이에 아버님은 뱀에 물려 돌아가셨단다. 지금의 나로서는 ‘병원가면 되지 않았을까?’하는 반문이 생긴다.
남편의 말로는 아버님 살아생전에는 괜찮은 살림이었다고 했다. 마을 대부분의 논과 밭이 시댁 것이었단다. 아버님이 며칠씩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의문들이 생겼지만... 어쩌면 남편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르는 그 말들에 난 지금껏 토를 달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때부터 7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우셨단다. 60을 바라보는 큰 시숙님과 40이 가까운 막내 시동생만이 대학을 나왔다. 그 외에 자식들의 학력은 다양하다. 초등학교 중퇴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큰 시숙님은 어머님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기둥이었기 때문에 있는 전답까지 모두 팔아가며 가르치셨다고 했다. 그래서 전남광주에서 공무원으로 계신다. 정년이 머지 않으셨다.
막내 시동생은 형들의 도움으로 목포 4년대를 나왔다. 시동생 말로는 남편의 도움이 제일 컸단다.
어머님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남편은 시골서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때부터 객지를 떠돌아야 했던 남편은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을 갖았다. 이 부분이 늘 남편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모진 세월을 혼자 힘으로 버텨냈을 어머님은 그래선지 입이 사정없이 거치시다. 애정표현도 할 줄 모르신다. 나의 첫 인사에도 몇 번 봤던 것처럼 “왔냐?” 가 다셨고, 남편에게는 “니이미, 씨발놈, 이제야 쳐 오냐?” 가 인사셨던 어머님 앞으로 난 겁 없이 달려갔던 것이다.
“어머니, 제가 뭘 해야 할지 알려 주시면 해볼게요. 시켜주세요.”
방글방글 웃으며 말하는 철부지인 나를 보고 어머니는,
“저그, 물간(수돗가)가서 솔 개지고 오니라.” 하셨다.
저그를 가리킨 곳은 달랑 수돗가 하나였으니 찾기 쉬웠다. 하지만 그곳 바닥에는 칫솔부터시작해서 바닥 닦는 큰 솔 운동화 빠는 작은 솔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놓여 있었다. 김치 하시다가 왜 솔을 달라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난, 대충 눈치껏 중간 솔을 갖고 가서 어머니께 내밀었다.
“어머니, 여기 솔이요.”
역시나 쾌활한 목소리로...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이 여간 심상찮은 것이다.
“아니, 뭐한데 그 솔을 갔고 왔냔말다!!! 니이미 씨벌...환장하겄네... 저그 솔 없대?”
어머니 못지않게 나 또한 환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역정까지 내시니 더 기죽을 수밖에.
“어머니, 저기 솔이 많던데, 그럼 어떤 솔을 가져 올까요?”
“환장하겄네!!! 아~, 저기 솔 안 뵈야?”
서울서 함께 내려간 3째 형님의 도움으로 난 그 솔이 칫솔도, 구두 솔도 아닌, 부추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의 웬수, 아빈 아빠는 그새 어디로 토꼈는지 나의 시선 안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서울로 올라가면 반은 죽음임을 남편 스스로 깨닫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와의 의사소통 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건 빙하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건조장(하우스) 찾아 삼만리, 해우(김) 찾아 구만리, 간나이-간낭-(양배추) 찾아 18만리...
나의 눈과 머리는 긴장 속에서, 그 험난함 속에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지금도 중간중간 누군가의 해석 없으면 대화하기 벅차니, 그때는 오죽했을까...)
그날 밤, 어찌됐던 처음 찾아간 시댁에서 우리는 제일 좋은 방(스레트지붕 방)에서 잘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침대 아니면 잠 못 이루는 나 때문에 남편은 장롱에 있는 이불을 모두 꺼내서 최대한 푹신하게 만들어 줬지만... 난 이불 속에서 엄마가 그리워서, 집으로 가고 싶어서 몰래 눈물을 닦아 냈다.
백열등의 희미한 불빛이 문 밖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에서 눈물 찔찔 짜고 있는데 방문 안으로 꾸부정하게 허리가 굽으신 어머니의 그림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낮에 알게 모르게 모든 이들에게 받았던 타향살이(?)의 설움을 뒤로 하고 난, 아빈이가 깰까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서울과 달리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을 그야말로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휘엉청 밝게 떴어야 할 달도, 별도 없었다. 단지 시댁의 백열전구만이 노랗게 빛날 뿐이었다.
“어머니, 혼자 뭐하세요?”
“제사 지내려고 준비한다.(도무지 사투리를 옮길 자신이 없어서 나름대로 해석했다.)”
새벽 3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그럼 다들 일어나시라고 말할까요?”
“무슨 소리하니? 나 혼자 해도 된다.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거라.”
참으로 간단한 대화인데 난 그 한마디를 알아듣기 위해서 어머니께 천천히 말씀해 달라고 부탁까지 드릴정도였고 여러 번 물어봐야 했다.
어머님 혼자서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난 말기 못 알아먹는 다고 구박하는 어머니 옆에서 굳건히 잔심부름을 해드렸다. 들어가라는 말에도 끄떡없이 말이다.
그런데 시숙님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초가집 방 한쪽에 어머님이 젯상을 다 차리고도 아무도 깨우지 않으시는 거다. 그리고 손수 정종을 잔에 따르셨다.
도통 알 수 없는 생소한 제사 앞에서 난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고 그냥 뒤에 서 있었다.
“워메, 잡것... 벌레지가 들어갔으야...”
술을 따르시던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께서 따르던 술잔을 벌컥 들이키셨다. 조상님들께서는 후손며느리가 마시고 난 다음으로 잔을 받으셔야 했다. 어찌됐건 난 졸지에 어머님과 단 둘이서 추석 제사를 지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야 알았다. 시댁은 추석이나 구정 제사는 형식적일 뿐, 제사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버님 제사 때는 동네잔치가 따로 없을 정도. 다음 해, 그때 역시 겁 없이 내려갔다가 동네 사람 식사 챙겨 드리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14년이 넘도록 난 어머니와 여전히 대화가 수월치 않다. 하지만...
“니이미...씨발...” 하고 욕을 달고 사시는 어머니께
“어머니, 저 튀김 다 했어요. 방도 다 치웠구요. 형님들 보다 제가 제일 이쁘죠? 그럼 여기다 뽀뽀해 주세요.”
하고 애교 떨 정도로 뱃보가 커져 버렸다. 아무도 감히 우리 어머니께 그렇게 말하는 형님들도 동서도 없었으니 말이다.
몇 해 전, 4째 시숙님이 산 아래에 땅을 사시고 그곳에 집을 지으셨다. 입식으로 말이다. 거실을 일부러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 올때마다 뿔뿔히 남의 집으로 흩어져서 잠자는 식구들을 배려한듯 하다.
돈 한 푼 보태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남편은 인부들을 데리고 내려가 설비에 관해서는 들어가는 재료들까지 모든 총괄, 전담했다.
입식으로 꾸며진 집에서 여자들은 이제 조금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
“니이미 씨발...”
하시는 어머님이 밉지 않다. 섭섭하지도 않다.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우리 둘만이 갖고 있는 언어의 장벽은 참으로 높다. 어머님 역시 내 말을 못 알아듣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어머님과 나와의 몸과 마음의 거리는 그래서 먼 것 같다. 그렇지만 난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 쪽에선 자주 못 가는 아들, 손주들, 며느리가 보고 싶겠지만 말이다...
난... 그래서 못된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