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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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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나의 웬수


BY 일상 속에서 2006-04-20

* 이글은 지난 달 <여성시대>란 라디오 프로에서 방송됐던 나의 글입니다. 요즘 저의 속을 다시 글기 시작하는 남편에게 터지기 직전인 나의 심기를 가다듬고자 저의 글을 다시 한번 꺼내 읽고 조금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산다고 흉보지 마시고 참으로 인생 제대로 겪으며 산다고 봐 주시길... ^^

 

“아빈 엄마! 이거 선물이야. 하루 앞당겨서 생일 축하해.”

밤 11시가 다 되어서 술에 취해 들어 온 남편이 작업복도 벗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와 나의 손을 펴더니 자신의 주먹을 올려놓고 말했다.


근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갔다 하면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남편...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남편을 째보는데 나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종이의 감촉이 심상치 않았다.


남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도 용서가 될 그 감촉... 손바닥 위에는 남편이 얼마나 꼭 쥐고 왔는지 뭉툭함에도 불구하고 펼쳐지지 않는 녹색지폐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세어 보니 50만원...


나는 결혼 생활 14년이 되도록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것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며칠 전에 이제 9살이 된 딸아이가

“엄마는 사탕 받는 날이 생일이야?” 라고 물었다.

어린 것이 엄마 생일도 알고 뿌듯했다. 어쩌다가 핸드폰에 스케줄로 남긴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물어 주는 그 말이 고마웠다.


그 날도 어김없이 취해 들어온 남편은 며칠 후에 있을 엄마 생일 이벤트를 준비하겠다고 분주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겁도 없이(?) 한다는 말이 “엄마 생일이 언젠데?” 한다. 생일이 언젠지도 여적 모르면서 묻는 말에는 굳이 알고 싶다는 성의도 느낄 수가 없었다.


두 달이 넘도록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편의 직업은 보일러 설비를 하는 자영업자. 하는 일에 비해 수금은 제때 되지 않고 물건 값은 미리 줘야 하고 인부들의 인건비 주기도 벅차하는 남편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본인은 오죽할까 싶어서 참고 참았다.


그래도 최악의 상태까지는 만들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게 해주는 남편의 책임감을 믿기에 어쩌다 한 번씩 잔소리 하는 것이 전부였던 나. 하지만 일요일인 어제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일요일이면 현장 사정상 휴무를 하는 남편에게 매일 집에서 잠만 자지 말고 똥차(13년 된 화물차)이긴 하지만 가까운 한강이라도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자고 부탁을 넘어서 사정까지 했건만 약속은 온대간대 없고 어김없이 다음날 쉰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술에 떡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온 남편은 오후 2시가 넘도록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이들도 이제는 포기했는지 컴퓨터를 한 시간씩 하더니 동화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TV 앞에서 뒹굴기도 하고...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참아야지 별수 있나...하고 남편을 깨워 늦은 점심을 먹고 치웠다.


그리고 TV 곁에 앉아 있는 식구들 곁으로 갔다. 만화 영화를 보자는 아이들의 성화에도 굳건히 리모컨을 사수(?)한 남편은 비장한 표정으로 스포츠를 보고 있었다. 그때 때맞춰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일인 화요일에 케잌이 도착 할 거라고 했다. 바로 옆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도 반응 없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생각으로 인내하던 나의 성품(?)은 어디로 갔는지,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제법 한 목소리 하는 나의 고음이 튀어 나오고야 말았다.


“내 생일 날 선물 해줘!!! 국어사전 들어있는 전자수첩으로. 그거 30만원 한다더라!”

TV를 보다 날벼락 맞은 놀란 남편의 눈이 커지더니,


“뭐하는데 그게 필요해?” 한다.


충분히 사줄 수 있는 능력이 되지만 그것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글을 조금씩 끄적거리는 것이 취미인 난, 딸리는 단어들이 참으로 많다. 국어사전이 없다보니 인터넷까지 들어가서 찾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선지 홈쇼핑에서 나오는 기능도 다양한 전자수첩을 볼 때마다 갖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속도 모르는 남편의 물음에 더 화가 난 나의 입에선 기관총이라도 발사되듯 쉴 새 없이 하고자 했던, 참았던 모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서글퍼지던지 눈물에 콧물가지 흘러내렸다. 이쯤 되니 남편이 언제나처럼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거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방에서 잤다.


다음 날인 오늘 새벽같이 현장으로 나가는 남편을 위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침상을 차려놓고 6시에 깨웠다. 피곤한 모습으로 겨우 일어나 앉아 밥 한 술 뜨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전날 나의 투정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출근하는 남편을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 다녀오세요.” 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배웅했다.


‘그래...내가 언제부터 생일을 따졌다고... 그래도 난 결혼 전 부모님 곁에서 만큼은 누릴 만큼 누려보고는 살았잖아.’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편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런데...

남편은 속없이 투정부린 나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준 것이다.

50만원을 건네주고 나서 힘겹게 닦고 나오자마자 몇 번 뒤척이다 이내 잠이 들어버린 남편의 입에서 잠꼬대 비슷한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도 사람이다. 미안한 거 모르겠냐...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해준 것이 없잖아. 뭐를 사서 줄까 생각해 봐도 생각나는 것이 없더라. 전자매장을 가봤더니 다들 비싸고...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한 것 직접 사. 애들도, 집도 신경 쓰지 말고 그 돈 당신 혼자 다 써. 전자수첩도 사고... 찜질방 한 달 티켓도 사고... 그런데 내가 정말 사주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만원이면 사는데 안 샀다. 당신이 유치하다고 할까봐...”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말에 얼른,


“뭔데 그게? 유치하다고 안 할 거니까 그거도 선물로 사주라.” 했더니 남편에게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드르렁... 드르렁... 그게 다였다.


아침에 꼭 물어 볼 생각이다.

 

ps ; 물론, 난 거금(?) 50만원으로 천원짜리 빤스 한장 사입지 못하고 큼지막하게 빵구 난 나의 가계생활 일부로 메꿔야 했다. 표도 안났지만...에거...

신호 초에 즐겨 부르던 나의 애창곡은 \' 아 옛날이여!!! \'였다.

하지만 지금은 \' 쨍하고 해뜰날~~~ \'을 즐겨부른다. 곧 그런 날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