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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를 보고...


BY 은하수 2006-01-16

왕의 남자를 보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을까봐 내심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먹을 것 많더라...

 

내가 예매까지 해가며 혼자서 야심한 시각에 극장을 갔던 이유는

첫째 감 우성이란 배우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란 굳건한 믿음을 안고서였다.

영화에 나오기전 티비에서 부터 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본 이후에는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난 그가 인기를 얻기 훨씬 전부터 좋아하였던 것이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깎은 듯한 미남은 아니지만

차분하면서 지적인 분위기가 매력있어 보였다.

요즘 인기있는 꽃미남이나 중성적 매력의 미남이 아닌

고전적인 굳센 남성상이 어딘지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정감이 흠뻑 묻어난 모습이

내 맘에 들었다.

 

한마디로 감성적인 남자같이 보인다.

그의 전공(동양화)이 그러한 내 느낌이 결코 착각만은 아니란 사실을 얘기해 준다.

줄을 타며 사설을 외는 장면에서

왕 앞에서 구성진 노래를 뽑는 장면에서

눈을 잃고 감옥에서 독백을 하는 장면에서

그리구 맹인의 몸으로 줄 위에 올라 공길과 사설을 주고 받은 후

공중으로 한껏 뛰어오르는 순간 멈춘 마지막 장면

에서 그가 영화에 녹아들었음을 장생이란 인물로 육화되었음을 느꼈다.

 

물론 그만 잘한다고 해서 영화가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야할 다른 배우들의 연기들도 너무 좋아서

하나된 팀웤을 느꼈고 영화의 사실감을 더해 주었다.

짝을 이루어 광대놀음을 했던 남자이면서 여자이기도 한 광대 공길 역의 이준기,

몹시 불행했던 그래서 주변인물들도 모두 불행하게 했던 비극의 왕 연산 역의 정진영,

왕도 품안에서 아이같이 주무르고 싶은 요부 녹수 역의 강성연,

왕을 돕고 싶어하지만 좌절하는 내시 처선 역의 조한선,

광대 놀음에 참여했을 얼굴 없는, 이름 모를 진짜 풍물패의 일원들 모두가

영화를 빛나게 하였다.

 

배우만 잘해서는 물론 안될 것이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 전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줄거리의 탄탄한 구성은 언제나

영화의 중요한 덕목이다.

얼마전 해리포터의 불의 잔을 보고 난 후 들었던 맥빠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당긴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속도감 넘치는 빠른 전개로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올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연산군 시절에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다는

역사서상의 한줄 문구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영화라는 허구 속이지만

희대의 폭군, 요즘으로 얘기하면 엽기에다 변태스런 

정신병자적인 요소가 다분히 많았던 패륜아로

역사에 오명을 떨친 연산군의 보다 개인적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계기도 되어

그 개인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단란한 가정은 커녕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 후에 

불어닥친 고독과 억압과 냉대 속에

외롭게 성장하면서 그의 유약한 인성은 몹시 비뚤어지고 틀어졌을 것 같다.

한참 엇나간 그를 바로 잡아줄 계기나 진심으로 아껴주는 어른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성군으로서의 강건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개인의 불행이나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전체 백성의 안위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훌륭한 임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역사책에 한페이지를 이렇게 장식했을지도 모른다.

\"불운하게 성장했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했던 칭송을 받았던 성군\" 이라고..

 

그를 보면서 이런 말을 떠올린다.

\"악한 것은 약한 것이고 선한 것은 강한 것이다.\"

악했던 그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어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가 필요했던 환자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그가 나라의 운명을 손에 쥔 군주였다는 점에서

그저 인간적으로 동정만 해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물에 사로잡힌 한마리 새처럼 어릴적 불행한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가 나라나 백성의 일까지 돌본다는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무기로 한풀이와 악행을 일삼은 그를 인간적인 면에서 동정을 할 수는 있겠지만

왕의 자격요건에는 못 미치는 함량미달의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임금은 불행한 역사를 썼다.

연산군에게서 원한이란 굴레를 덮어쓴 나약한 인간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싹과 같은 어릴적에 입은 상처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가를 보았다.

 

공길. 그는 아름다운 광대였다.

중국의 경극 분장을 했을 땐 장국영의 \"패왕별희\"를 떠올렸다.

여자같은 남자 공길을 사랑하는 주인공 장생을 보면서

나 역시 공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성애에서 보통 떠올리는 추잡함이 아닌 어떤 신비스런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역시 두 사람 사이에 광대놀음이라는 예술행위가 매개되었을 때 제일 그랬다.

 

공길에 대한 왕의 사랑은 아름다와 보이지 않았지만 장생의 사랑은 아름다와 보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줄곧 남아 있는 잔상은

공길과 장생이 나누는 서로에 대한 고백과도 같은 사설 속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감정의 일치를 이룬 순간

줄 위에서 마지막 곡예를 하는 장면에서 멈추었다.

그리구 둘이서 하얀 들꽃(메밀꽃?)이 가득 핀 벌판을 헤치며 가는

장면은  둘의 사랑을 더욱 순백하게 해주었으며 패왕별희보다 밝은 색채를 띠었다.

 

또 내가 처음부터 영화에 푹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줄타기 장면이었다.

이삼년전 봄에 용인민속촌에서 줄타기를 본 적이 있었다.

줄타는 기술도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줄타는 이의 사설솜씨도 뛰어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눈과 귀를 떼지 못하고 감탄하며 구경한 후 줄타기가 단순한 곡예가 아니고 또다른

매력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임을 알았었다.

영화의 처음 장면 장생이 줄타며 사설하는 장면에서 부터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영화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던 것이다.

공중에서 외줄을 타는 것도 어려운데 거기에 촌철살인의 재기 넘치는 입담까지 겸비해야

하니 그야말로 타고난 광대라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풍물놀이도 좋았다.

궁중 연회도 화려함의 극치였다.

 

영화는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데

역시 친절한 영화임에 틀림이 없었다.

 

당분간 하늘을 바라보면

자유로운 영혼의 빛을 발하는 구리빛 얼굴의 장생과

신비스런 눈을 한 하얀 얼굴의 공길이 공중으로 재주 넘는 장면이

무시로 떠오를 것 같다.

 

명대사도 참 많았는데

그 중에도 왕을 앞에 두고 장생이 했던 말

\"이 궁(줄)에선 내가 왕이야.\"

 

장생은 광대이지만 누구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하지 않았다.

소경이 되고서도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저 허허 웃어 넘길 수 있는 삶의 자세가 그를 왕이게 하였다.

다음 생에서도 광대로 태어나겠다는 그의 외침에는

자신에 대한 깊은 긍지와 애정이 넘쳐나는 듯 했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