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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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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BY hayoon1021 2006-01-11

 

텔레비전 혼자 신이 났던 연말을 보내고, 새해 아침이 되자 나는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헛살았어, 어쩜 문자도 하나 안 오냐?

“먼저 보내, 그럼 되잖아?”

남편은 콕 집어 정답을 일러 주었다. 

무심한 것도 습관이라고, 언제부턴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을 안 하게 돼 버렸다. 특히 직장 그만 두고 들어앉은 지난 1년은 더 심하게 껍질 속의 땅콩처럼 살았다. 정말 친한 사람이라야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인데, 그마저도 관리를 게을리 했으니 이런 쓸쓸한 벌을 받나 보았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새해 들어 몇 군데서 문자가 왔다. 어찌나 감사한지, 멋진 답을 구상하며 하루를 그냥 보내고 다음날에야 핸드폰을 앞에 두고 앉았다. 답장부터 꼭꼭 찍어 보내고 내친 김에 여기저기 안부를 물었다.

몇 분 안 걸리는 일인데도 왜 진작 그걸 못 했던 것인지. 이제 곧 답이 쇄도하리라. 나는 흐뭇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이게 웬일? 24시간이 지나도록 한 통의 답도 없었다. 은둔생활 1년 만에 결국 세상에 버림받은 것인가?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곧 의문과 걱정이 뒤따랐다. 다들 짠 것처럼 이럴 수는 없어, 진짜 뭔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드디어 새벽 2시에, 그동안 일이 바빴다는 한 친구의 답을 시작으로 드문드문 며칠에 걸쳐 답이 날아들었다. 그때 비로소 느낀 건, 내 주변 사람들도 어지간히 나처럼 반응이 한 박자 느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다들 잘 지낸다는 것이 새삼 반갑고 고마웠다.

문자로 때운 나와 달리 남편은 직접 전화를 했다. 남편은 전화할 때 딴사람이 된다. 하루 종일 입도 안 떼던 사람이 갑자기 로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기가 살아난다. 밝고 우렁찬 목소리하며 말투는 또 어찌나 깍듯하고 예의바른지. 나한테도 저렇게 좀 말해 보지, 그게 접대용 화술임을 알면서도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그 똑같은 인사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누구한테 그렇게 친절한 안부전화를 일일이 다 했냐고 물었다. 지금껏 일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한테 다 했단다. 현장일 하면서 스쳐 지나는 사람이 한둘인가? 하지만 남편은 그들이 기억하건 말건 연초에 인사라도 해 두어야 필요할 때 불러줄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참으로 계산적인, 그러나 눈물 나는 전략이었다.

최선을 다 하는 남편이 듬직하면서도 나는 괜히 딴소리를 했다.

“일가친척이나 좀 챙기시지?”

“일가친척이 밥 먹여 주냐? 챙길 일가친척이나 있냐?”

남편이 꽥꽥 쏘아붙인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남편은 실실 웃으며 아무개 씨한테도 연락을 했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개 씨는 작년에 남편이 따라다니던 십장이었다. 남편은 기술을 배울 목적으로 그에게 헌신했는데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저 성실한 남편을 이용만 해먹으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먼저 그를 떠났다.

그 사람한테도 공사를 잘 딴다는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만 있으면 일은 꾸준히 보장되었다. 남편은 당장의 이점과 앞날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떠난 건 잘한 일이다. 아니면 아직도 잡부 신세를 못 면했을 거니까. 

“전화는 뭐 하러 해? 반겨줄까 봐서?”

역시나, 그는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남편이 이름을 밝히자 허둥대며 전화를 끊더란다.

“일만 연결된다면 누가 됐든 상관없어.”

남편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내가 더 자존심이 상했다. 건설 노동자들에게 겨울은 독약 같은 거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듯이 일도 뚝 끊어지고 만다. 그나마 간간히 생기는 일감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짠다. 남편도 참다못해 그 사람한테까지 손을 내밀게 된 것이리라.

어째서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까지 참담해지는가? 난 먹던 밥이 목에 탁 걸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허허 웃었다. 저 웃음 뒤에 어떤 진심이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정말로 남편은 이제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는 막노동꾼 티를 안 내려고 퇴근할 때 새 옷으로 갈아입을 만큼 수줍고 여린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전업한 지 불과 3년도 안 된 지금, 살인이나 도둑질만 아니면 그 무엇도 못 할 게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 환경에 단련되기는 순식간의 일이다. 나는 많이 뻔뻔해진 남편의 모습이 당당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남편이 몸에 남은 단 하나의 실오라기마저 포기하는 심정으로 몸부림치는데도 삶은 여전히 각박하다는 사실과 이제 더는 벗어던질 것도 없는데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한꺼번에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