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친구 은숙이의 생일이라 전화를 걸었다.
은숙이와는 스무 살 때 직장 동료로 만났으니, 벌써 20년 지기다. 10년 전 내가 서울로 올라오고부터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안부전화도 몇 달에 한 번씩 하는 정도다. 하지만 눈과 귀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하거나 염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중에 한 번 위태로웠던 적은 있었다. 은숙이는 나보다 결혼을 일찍 했는데, 7년 동안 아이가 안 생겼다. 그때 나는 서울생활에 적응하랴 연애하랴 바빠서 마음고생이 심한 은숙이를 챙겨주지 못했다. 가끔 통화하더라도 건성으로 위로해 주는 식이었다. 나는 그때 결혼 전이었고 아이에 대한 관심도 없었으니 은숙이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내 태도가 은숙이로선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숙이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서른 넘어 결혼하자마자 첫아이를 덜컥 낳았으니 은숙이 입장에선 더 착잡했으리라. 자매지간에도 아이 문제에선 샘을 낸다는데 친한 친구라고 다를까. 나는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은숙이와 거리낌 없는 대화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차츰 은숙이는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가끔 하는 전화통화마저도 시들해 했고, 나중에는 연락 자체를 꺼렸다. 은숙이는 나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와 단절하려는 태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은숙이와 멀어져 버렸다. 그런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행히 내가 둘째를 가진 해에 은숙이도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은숙이는 차츰 지난 7년간의 악몽을 털고 밝아졌다. 그제야 나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은숙이한테 다가갈 수 있었다. 만약 은숙이한테 영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그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은숙이는 따뜻하고 편안한 성격이었다. 불평불만으로 날이 서 있는 스무 살의 내게 은숙이는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었다. 난 마치 돌아가신 엄마를 만난 것처럼 은숙이한테 빠져 들었던 것 같다. 그건 단순한 우정을 넘는 감정이었다. 지독한 사랑이고 집착이었다. 은숙이한테 몰입하던 때와 비슷한 열정을 나는 나중에 남편한테 다시 느끼게 된다. 그걸 보면 한 사람을 향한 극한의 열정은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름은 상관없이 같은 감정임을 알 수 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숙이 목소리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은숙이는 골똘하게 어디 돈 벌러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린 것들 떼놓고 직장에 다녀봤던 나는 침 튀겨 가며 말렸다. 생각만큼 돈은 안 모이면서 집안 꼴만 더 엉망이 되니 아이를 좀 더 키워 놓은 다음에 나가라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은숙이는 남편이 갖다 주는 돈만 갖고 살자니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 얘기, 아이들 얘기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입을 모았다. 이웃에 살면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잘한 일상들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은숙이나 나나 주변에 마음 맞는 친구가 없다 보니 그 바람은 더 간절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애틋할 수도 있다고 서로 위로하며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그런데 잘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에야 정작 은숙이의 생일 얘기는 꺼내지도 못 했음을 깨달았다. 머리를 쥐어박으며 얼른 다시 전화를 했다.
“야, 내가 어제 너 생일 축하하려고 전화한 건데.”
“그래, 안다.”
“응?”
은숙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투로 받았다. 그래, 안다. 그 한 마디가 어찌나 고맙던지,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더 가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