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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내리던 날


BY 개망초꽃 2005-12-06

토요일 밤, 카페 창가에 앉았다. 주문을 받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 벨을 눌렀다. 원두커피를 시켰다. 두 송이 꽃이 찍혀진 하얀 커피 잔에 커피는 출렁거렸다. 각설탕을 두개씩 넣었다. 스푼으로 저었다. 독일 사람은 설탕을 넣고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젓는데, 프랑스 사람은 세모를 그리며 젓고, 중국 사람은 아래위로 젓는데, 왜 그럴까? 답은... 설탕이 녹으라고 젓는데,하하하 재밌지?  꼴밤 한 대가 날아왔다.


달작 지근한 커피를 식혀가며 마시는데 창밖에 눈이 날렸다. 가로등 불빛 주변엔 눈 알갱이가 한 알 한 알 살아 보였다. 공식적인 기상청 집개론 이번이 첫눈이 아니라는데, 내가 본 건 처음이니까 첫 눈이다. 우~ 아! 첫눈이다. 나도 첫 눈이다. 이렇게 눈이 내리길 바랬어. 난 오늘 눈이 올 줄 알았어, 밤에 눈이 온다고 했거든 많이...내 눈과 하얀 눈을 마주하며 오랫동안 창 밖을 보았다. 설렌다. 내리는 눈을 봐도 나는 꿈틀거린다.


첫눈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오늘처럼 아름답지 않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 눈은 한 꺼풀 한 꺼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땅위에 누워있었다. 알몸은 순백이다. 만지면 파르르 떨리는 가냘픈 몸이다. 건드리면 후르르 날린다. 나뭇가지를 발로 차니 기다렸다는 듯이 눈가루가 쓰러진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눈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내 내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며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는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난다. 눈은 죽었던 것들을 다시 살려내고, 어두운 거리에 새벽 동이 튼다. 잠궜던 문을 활짝 열리게 하고, 마른 풀을 촉촉히 흐르게 한다. 나무마다 가지를 벌리고, 푸른 잎은 솜을 덥고 따스하게 밤을 보내게 한다. 땅이 하나로 모이게 하고, 산을 평평하게 한다. 길이 보이지 않고, 외길로 만나 한 몸으로 밤을 새운다.


카페를 나와 차 안에 앉았다. 눈이 쌓여 창마다 휘장을 쳤다. 차창을 가린 눈이 녹으며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물방울은 음악이 된다. 떨어지는 끝에서 실로폰 치는 소리가 난다. 가볍게 높은 음을 친다.


눈을 먹어본 적이 있어? 입을 햐 벌리고 혀를 내밀고 받아먹으면 입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얼굴로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았어. 목화솜만한게 떨어지면 온 몸이 짜릿해. 눈동자 쪽으로 떨어지면 눈을 얼른 감아버리지, 키스를 하면 저절로 눈을 감게 돼. 그건 왜 그런지 알어? 음미하려고 그러지, 그 감각을 최대한 살려내려고 그러는 거야. 눈이 눈동자로 떨어지면 얼른 감는 건 눈을 보호하려는 본능인 것처럼, 키스를 하면서 눈을 감게 되는 건 그 감촉을 온 몸으로 느끼려는 본능 때문이야.


눈이 허리까지 내린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어. 외할아버지가 뒷간가는 길을 뚫어 주셨지. 터널 같았어. 이웃집과 집사이도 터널 같은 길을 만들었지. 지붕만 보이는 집에서 아침을 짓는 연기를 보면 저 열기로 눈이 녹아 지붕에서 눈이 뭉텅이로 흘러내릴 것 같았어.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지, 한낮이 되면 눈이 찰흙처럼 땅바닥에 털푸덕털썩 떨어졌어. 아무도 건들지 않은 눈을 심심하면 집어 먹었어. 눈 위에 반사된 햇볕에 눈이 시렸어. 가늘게 눈을 뜨고 눈을 한 움큼씩 집어 먹었어. 어떤 맛이었냐고? 기억나지 않아. 눈 맛이었겠지, 히힛. 내 말이 싱겁다고? 그래, 맞아! 싱거웠다 헤헷. 고드름은 얼음사탕이 되지, 양지쪽에 앉아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어, 달지 않았어. 우리 박하사탕 먹자?


우린 박하사탕을 깨물어 먹었다. 차 안에 박하향이 번진다. 박하사탕 깨물어 먹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박하 향에 입안이 환하다. 밖은 눈이 쌓여 환하다. 조각상도 환해지고, 세워 놓은 차도 환하다. 어둠 속에 후레쉬를 환하게 밝히고 마실을 가듯 마음이 들뜬다. 나는 오늘 마실을 나왔다. 우연히 마실가는 길에서 너를 만나 눈길을  걷고, 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창에 녹아내리는 눈을 보며 박하사탕을 먹었다.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깨물어 먹는 사람 성격은 급하지만 모험심이 강하고 진취적이래. 너는?  삼분의 일쯤 빨아 먹다가 깨물어 먹지. 나도 그런데, 우린 똑같다. 끝까지 빨아 먹는 사람은 소심한 사람이래, 꼼꼼하고 좀스럽기도 하데. 그럼 우린? 우린...삼분의 이는 소심하면서도 삼분의 일은 강하고 진취적인 성격이겠지. 그럼 반반 섞인 게 좋은 거니까 이제부터 사탕 먹을 때 반은 빨아먹다가 깨물어 먹어야지. 치...그건 조작이다.


날씨가 추워 도로가 얼어 있었다. 시험 삼아 브레이크를 잡아본다. 썰매를 타듯 미끄러진다. 처음 면허를 따고 포니를 끌고 강화도를 간적이 있었어. 겨울이었지.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차가 빙글 돌더니 나무를 박고 휙 날아서 밭으로 떨어졌지. 뒤집어 지지도 않고 그대로 떨어져서 다치지 않았어. 요즘 차들은 웬만해선 돌지 않고 미끄러지기만 해. 차 자체에서 도는걸 방지하게 만들어졌어. 시내 쪽으로 나오니 도로는 녹아 있었다. 눈은 멈추지 않았다. 일산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밀린다. 큰 트럭이 꼼짝을 하지 않고 진입로에 서 있다. 운전자가 바퀴에 매달려 체인을 끼고 있었다. 눈 때문에 트럭이 움직일 수 없나보다.

 

마실을 가다가 우연히 너를 만나고, 첫 눈을 만났다. 쌓여진 눈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만들어 걷는다. 눈이 멈추지 않고 차창으로 달겨든다. 창문 너머 자유로는 어둡고 두렵다. 그래도 급하게 달리지 말자. 목적지는 있다, 있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