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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터널을 지났다.


BY 선물 2005-11-14

고등학교는 엄마 옆에서 다니고 싶다고 딸아이는 늘 말해왔었다.

그런데도 집 가까이 있는 일반 고등학교가 왠지 살갑게 느껴지질 않았다.

막연하게 내 아이와  인연이 닿을 것 같지 않은 학교였다. 

 

10월 초 어느 날, 아이는 난데 없이 집 가까이 있는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처음 보성으로 보냈을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엄마가 보고싶다며 울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열 다섯 어린 나이의 딸아이가 가족과 떨어져 살았는데 또 다시 멀리서 그리워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단호했다. 그 깊은 속사정을 다 알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아이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미 학교에서는 진학지도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갑자기 진로를 바꾼 아이때문에 선생님들과 상담이 잦아졌다.

 

선생님은 아이가 원하는 대안고등학교에 대해 생각 이상으로 긍정적이셨다.

그러나 아이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담양에 있는 그 학교는 나도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학교였는데 지원자가 많이 몰릴 것 같아 걱정이었다.

제한된 인원을 뽑는데 그 속에 우리 아이가 끼일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미리부터 학교를 방문하고 상담을 하며 그 학교 분위기를 익혀왔고 그 학교 입학을 위해 1년을 휴학하는 아이들까지 있는 마당에 갑자기 그 학교를 선택하게 된 내 입장에서는 자신감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 아빠는 정 반대였다.

어디엘 가도 우리 아이는 환영 받을 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해 기대하지 않으랴마는 남편은 확실히 심할 만큼 자식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객관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남편보다는 훨씬 긴장되었고 딸아이는 또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합격하고 2차 면접을 보던 날, 딸아이는 밝은 모습이었다.

면접하시는 선생님 앞에서 노래까지 불렀다며 아무래도 노래까지 한 자기를 떨어뜨리시진 않을 것 같다며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밝은 표정의 선배들과 그들이 수확한 달디 단 고구마를 먹으며 우리는 어느 정도 긴장을 떨칠 수가 있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딸아이를 포함해서 네 친구가 함께 지원했는데 모두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친구들 모두 딸아이와 친한 아이들이라 더 마음이 놓였다.

 

10월 한달 내내 전국 방방곡곡 이 학교 저 학교를 탐방하느라 남편과 나는 제대로 잠못 이룬 날들도 많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원했던 학교로 결정이 난 지금은 참으로 평화롭다.

물론 시작은 지금부터이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귀중한 3년을 보내는 딸아이가 정말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훌쩍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또 하나의 터널을 빠져 나온 우리는 다시 손모아 기도한다.

부디 우뚝 서는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