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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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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와서 만난 이웃


BY 은하수 2005-09-01

봄에 이사온 뒤 한 달쯤 지난 어느날

아침에 경비실 앞을 지나다가 아주 깜짝 놀랐다.

키 크고 허우대 지나치게 좋은 어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경비 아저씨와 얘기하던 도중

우연히?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난 순간적으로 아는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난 못본 척하고 지나쳐 버렸다.

아는 얼굴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당연히 인사는 건네야 하는데

난 그럴 수 없었다.

 

지난번 살던 데서 약간 떨어진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된 터라 거의

생면부지의 곳이라 할 수 있는데다 그새

안면을 틔운 앞집 사람들 말고는 아직

아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한데 

 

낯 익는 얼굴을 집 앞에서 만나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인데...

 

만일

분위기 고상하고 근사한 곳에서

유쾌하고 멋지고 신나는 모습일 때

상큼발랄한 인연으로 만났던 기억이라면

연세도 있으신 아저씨에게 젊은 내가 먼저 아는척 하면서 안부를 묻는 것이

뜻밖의 재회에 대한 기꺼운 반응이었겠지만

의리 희박하고 도덕점수 리버럴한

난 얍실하게도 모른척 해 버렸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그리 기억에 남을만하다거나

사무치게 기억하고 싶은 만남이었던건 아니었나 보다... 과거에.

지금도 당황스럽긴 비슷하지만...

 

아저씨도 날 흘낏 쳐다 보긴 한 것 같은데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이고, 아저씨도 너무 오랜 만이라 잊어 버렸나 보다... 그래... 기억을 못할 거야...

나 좋은 쪽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 뒤에도 1-2번 스친 것도 같다. 그러나 아는척 하진 않았다.

뭣보다 계면쩍어서였다.

 

드디어 어느날 퇴근한 남편이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남편- 있잖아... 글쎄말이야...

나- 뭔데?

남편- 내가 현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 누군지 알아...? 글쎄 그 때 옛날에 입원했을 때

         한병실 썼던 아줌마와 아저씨를  만났어...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 우릴 기억하더라

         구... 글쎄 @@@호 산다지 뭐겠어... 아줌마도 우릴 언제한번 봤었는데 어디 다니러 왔

         나보다고 생각했다는대... 신기하지... 참 세상 좁다니까...

나- 그래 말이야... 남 돈떼먹고 도망간 사람들은 어찌 사나... 이렇게 만날까바 무서버서...

       그나 저나 넘 창피해... 새로 이사와서 새 기분 내려고 했는데... 틀렸네...

남편- 그럴 필요 뭐 있어... 누구라도 아프면 별 수 있어...? 아저씨가 이제 괜찮냐구 묻더라...

         언제 술 한번 먹자는대... 그리구 그 때일 기억 잘 못한다고 내가 그랬어...

 

1년전 여름의 초입 무렵 내가 1주일 정도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맞은 편 침대에는 아줌마가 맹장수술을 받고 누워 계셨었다.

 

난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잠만 잤었고

비몽사몽간에 나눈 대화도 잠자면서 잊어 버리고 

화장실 물내리는 것도  깜빡 잊어 버리고

우아한 체면도 수정같은 이성도 잠시 잊어 버리고 

머리도 부시시하고 화장은 커녕 세수도 잘 안한 얼굴로

울다가 웃다가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으니

썩 유쾌한 만남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

 

얘기 중에 그 분들도 병원과는 먼 거리에 있는 우리 사는 동네의 근방에서 오셨다는 걸

알게 됐고 서로 신기해 하였었다.

 

아줌마처럼 맹장염으로 입원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내심 부러워하다가

뇌출혈로 투병중인 그 분의 동생보다는 내가 나으려니하고 애써 혼자 위로하기도 했었다.

 

1주일후 서로의 쾌유를 빌어 주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내가 먼저 퇴원했었다.

아줌마는 내가 퇴원함으로써 아저씨가 밤에 자러 오실 수 있게 되어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세월이 약인지 암튼(약간 운도 있었겠지만)

그 때의 암울한 상황에서 많이 비켜난 시점인 1년 후인 최근 

새로 이사온 동네에서 우아 좀 떨어 보며 살려 했었는데

 

내 가난한 몰골을 보아버린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그때까지 이미 꽤 퇴색해 한켠에 접혀지려던 과거가 그 분들과 만남으로 해서

다시 생생하게 빛을 띠게 되었다.....

 

무슨 조화일까?

 

아저씨는 몇일 후 바다낚시로 잡은 숭어회와 소주를 한 상 차려놓고

우리를 부르셨다.

 

숭어회가 참 맛있었다.

소주를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는 것이 난 신기했다.

 

우리도 한번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이상은 기이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였읍니다.

두번이나 우연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