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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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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터널 밖으로


BY 그린미 2005-06-11


 하늘 색깔이 파랗다는 건 건강할 때는 잘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아침 햇살이 저리도 고울 수가 있을까 하는 경이로움도 건강할 때는 놓치고 삽니다.

 내 주변의 평범함이 내 둘레가 밋밋함이 때로는 따분하다고 투정하는 것도 건강할 때의 오만입니다.

 병상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기어 들어오는 바람의 냄새도 맡아보았습니다.

 어제의 하늘도 아니었고 어제의 바람 내음도 아니더이다.

 문명의 발달, 의학의 발달로 내 목숨 이어진 게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덤으로 살아난 플러스 알파의 삶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조금씩 느꼈던 일주일이었습니다.

 아직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살아가는데 조금도 다치지 않은 온전함에 눈물 쏟도록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혹여 내 삶에 흠집이 날까 두려워하면서 움츠리고 살았던 흔적들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이젠  반세기 티끌들 정돈하며 손질하고 접힌 구석 판판하게 펴 가면서 살고 싶어지더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 라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 심정 무얼로 대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한정의 성숙이 욕심일지는 몰라도 더 크고 싶은 건 호된 역질을 겪은 나머지 내린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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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원하고 나서 걱정 해 주시는 분에게 보내드린 메일의 일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준 게 너무 미안하고 염치없어서 제일 먼저 인사치레를 해야 맘이 놓였다.

 퇴원한지 일주일만에 두 분의 제사를 아픈 배 움켜쥐고 내 손으로 모셨다.

 생략하라는 어른들의 말은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다.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내 할 일, 내 도리 팽게친다는 게 두고두고 목에 걸린 오물질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 제가 맘 편할려고 제사 지내려고 합니다. 저를 위해서요......"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더 이상 말리려 들지 않았다.

 서둘러 조기 퇴원할려고 했을 때 남편은 나에게 희귀종이라고 혀를 찼다.

 웬만하면 일부러라도 피해 갈려고 하는 게 제사인데 그 제사 때문에 일찍 퇴원 하려는 나를 스무 해 넘게 산 남편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내 몸에 맞게 익숙해 버린 가정사를 이런저런 핑게로 무시하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입원하고 있던 병실은 6인 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보호자 침대가 없어서 환자가 불편을 느낄 것 같았는데 의외로 불편하지가 않았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이 일일이 다 수발을 들어 주어서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메너가 돋보이는 병원이었다.

 수술하고 4일 동안은 참 힘들었다.

 통증 완화제가 떨어지고 나니 그 다음에 찾아드는 통증은 한마디로 애매했다.

 진통제 맞기는 약하고 그냥 있기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통증이라는 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출산하고 훗(後)배 아픈 거 하고 증세가 똑 같았다.

 아랫배가 뻐근하고 팽팽하게 당기는 느낌과 아직 아물지 않은 절개 부분은 잔기침만 해도 찢어질듯이 아파서 한바탕 곤역을 치루어야 했다.

 빈혈이 심해서 수술하면서 수혈을 했고 수술 후에도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아서 계속 남의 피를 내 몸 속에 흘려 넣어야 했다.

 양팔에 주렁주렁 달린 링겔의 숫자가 여섯 개였다. 끔찍했다.

 내 혈관을 타고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맑은 액체와 누구의 핀지 알수 없는 검붉은 액체가 온 몸을 기어 다녔다.

 갑자기 두드러기가 돋는 느낌에 온몸이 가려웠다.

 주사기를 꽂은 양손이 팽팽하게 부어 올랐고 군데군데 찌르다 만 주사기 자국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 바뀌면 밤새 뒤척이는 내 까다로운 잠버릇은 입원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옆 병상 환자의 숨소리 기침소리 그리고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의 발자국소리 때문에 길지도 않은 여름밤은 동짓달 긴 밤보다도 더 길고 암울한 색깔로 다가왔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시커먼 하늘이 허옇게 벗겨지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pole대(이동식 걸대)를 끌고 병동 안을 돌아 다녔다. 밤 시간을 압축시키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여지를 만들기에도 이 시간이 좋았다.
  간호사 하나가 의자에 앉아서 졸다가 나를 보더니 벌에 쏘인 듯이 후다닥 일어났다.
  미안했다 ,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까.
  내 딸아이 도래의 간호사들이 밤에도 낮같이 움직이는 게 너무 안스러워서 될 수 있으면 간호사들의 손을 안 빌리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창밖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색 건물들 사이에 불켜진 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일까.
 나처럼 잠 못 이루는 아픈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만일에 여자라면 저 여자도 나처럼 배를 가르고 속을 꺼집어 냈을까.

  나만 예외일 것 같았고 나만은 피해 갈 줄 알았던 이 수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이 오만과 안일함이 직격탄을 맞고 보니 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군중 속의 한사람이란 지극히 평범한 논리에 고개를 꺾어야 했다.
 내가 불행을 피해 가는 게 아니고 불행이 나를 피해 가기 바랬던 어처구니없는 망상이 시간이 갈수록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느슨한 일상이 가끔은 팽팽하게 활시위 당기듯 약간의 긴장과 방어 자세가 필요했다.
 얼마 전'게으름의 극치'라는 글을 올릴 때 만 해도 스스로 게으르다고 인정하는 척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천만의 말씀'이라는 걸 요즘 뼈저리게 까발려 놓았다.
 100%의 인정이 아니면 1%의 부정보다도 더 신빙성이 없다.

 

 입원실에는 나처럼 착각과 무신경으로 버텨온 미련한 사람들로 빈 병상이 없을 정도로 동병상련의 환자로 우글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친해지고 속마음 부담 없이 털어놓고 들어 주는 십년지기가 되었다.
 내 옆에는 스물 세 살의 미혼의 환자가 약물치료로 버티다가 결국엔 수술을 받아야 하는 불행을 맞았다.
 앞날에 대한 암울한 생각에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답답했다.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고드는 이 병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상태로 많은 여성들이 맘을 두고 있지 않는 게 환자의 수를 부풀렸다.

 퇴원하는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만 캄캄한 터널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동안에 쌓은 인연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두 번 다시 여기서 만나지 말자고 오금을 박았다.

 

 터널 밖은 환했다.
 입구에서 차마 발 들여놓기가 겁이 나서 제자리 뱅뱅 돌아다니며 누구에겐가 종주먹 들이대고 악을 쓰고 싶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두 눈 꼬옥 감고 죽은 듯이 숨 몰아쉬며 음습하고 냉냉한 터널 속으로 내 몸 밀어 넣었던 무서웠던 시간들도 있었다.
 시간이 막힘 없이 공간을 휘저으며 나를 터널 밖으로 끄집어내었을 때 안도감에 목놓아 울고 싶었던 시간들도 또한 있었다.
 비록 닭 잡는 데 소 잡는 흉내로 엄살을 피웠다고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내 일생에 한 획을 그은 대 사건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피 터지게 부딪혀 본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잡초의 그 끈기 있고 악착같은 생명력이 너무 부족했기에 침소봉대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직은 내 몸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덤으로 살고 있다는 감사함은 오래도록 나를 지배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