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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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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입구에서....(필독하셨으면...)


BY 그린미 2005-06-09

 

 "수술해야 합니다."
 옷을 추스리고 진찰대 위에서 막 내려 선 나에게 던진 의사의 건조하고도 사무적인 소견에 머리끝에 바늘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약물 치료는 불가능합니까?"
 마지막 지푸라기 아니 어쩌면 수술을 약물로도 가능하게 할 것 같은 의사의 무한한 능력을 믿고 싶어서 매 달리는 심정으로 치료 방법을 바꿔 달라고 난 애원에 가까운 표정으로  한껏 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의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늦었습니다...약물로도 안됩니다."
 택도 없는 얘기에 더 이상 시간 빼앗기는 게 못내 못 마땅한지 내 말을 그냥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그럼 수술이라면...........?"
 난 어느새 더듬거리며 끝말을 잇지 못했다.
 "들어내야 합니다.."
 마치 손끝에 박힌 가시 빼내듯이 빠르고도 간단하게 결론 내린 의사는 망연자실 해 하는 내가 좀 안되어 보였는지 얼굴 표정에 약간의 웃음기를 띄웠다.
 "워낙 흔한 병이니까 그리 걱정할 건 없습니다."
 아무리 흔해도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데 매일 환자 들여다보는 저 의사에게는 소음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알아볼 수도 없이 휘갈겨 쓴 처방전을 들고 병원 문을 나서니 문득 갈곳을 잃어버린 미아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몸 속에서 끓는 김이 땀구멍으로 하얗게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지를 지질 듯한 햇살은 머리털을 지글지글 볶아대었고 아스팔트 위를 튕겨서 반사된 열기로 인해서 길거리는 후끈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온몸이 뒤틀려서 휘청거렸고 요란하게 옆을 스치는 차량들도 넘어질듯이 위태로웠다.
 바퀴가 달아나서 내 쪽으로 기우는 차량들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이 목이 조여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상가 건물들이 폭격 맞은 것 같이 흉하게 일그러져서 성냥갑처럼 구겨진 채로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토해 냈다.
 내가 서 있는 버스 승강장이 아래로 쳐 박힐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지진이라도 나서 몽땅 쓸어 버려라. 갈라지고 무너지고 그래서 아무런 형체도 남기지 말고 모두 모두 한 구덩이로 묻어 버려라.'
누구를 향한 반발인지 난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다.
나만 소외 된 것 같았고 나만 억울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은, 단단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절망감에 피를 토하고 싶었다.
 내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택도 없다. 지금 까지 링겔 한번 팔에 꽂지 않고도 이 나이까지 잘도 살았는데 이제 와서 내 몸에 칼을 대야 한다고?
 저 의사 놈 혹시 가짜 아냐?
 진찰실 벽에 버젓하게 걸려있는 의사 면허증을 혹시 돈주고 사들인 엉터리 자격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발을 해야 한다.
 이 고장에서 30년 가까이 여자 가랭이 벌려서 벌어들인 돈 만해도 천문학적일텐데 오진까지 했다면 콩밥 먹여야 한다.
 수 십 년 째 이 지방에서 명성 얻고 있는 그 유능한 의사를 난 돌팔이 취급을 해야만 왠지 맘이 놓였다.
 아무리 유명해도 오진은 있을 수 있다. 암 있고 말고..
 부채 살 같이 반원을 그리듯이 드러난 시커먼 초음파 사진을 난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보기보단 참 미련스러운 사람이네"
 두 번째 병원 - 내가 수술 받은 곳 - 에 가서 맨 처음 들은 소리는 미련하다는 소리였다.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지낸 老 의사는 나를 보고 혀를 찼다.
 겉보기는 말끔하고도 깔끔하게 정장 차려 입고 날아갈 듯한 매무새로 의사 앞에 앉은 나는 시커멓게 썩어 가는 속을 이 낯선 의사에게 다 드러내 놓고 이젠 처분만 기다려야 했다.
 손과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이젠 약물치료 운운 할 형편도 아니었고 매 달릴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빠른 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응급실에 실려온 위험한 상태라고 안 그래도 파랗게 질린 나에게 날이 선 송곳을 들이대었다.
이상하게 맘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속으로 와들거리는 솔직함은 아이러니컬 하기만 하다

 휴게실 벤취에 앉아서 아무생각 없이 초점 분산시키며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달리는 차량들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도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서 있는 건물들도 모두  흔들림 없이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지금 나만 약간의 어지럼증으로 남아 있는 내 할 일에 대해서 맘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신고 온 구두의 앞부분이 조금 망가져 있었다.
 내가 다시 이 구두를 신고 내 가고 싶은 곳, 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게끔 시간이 기다려 줄까.
 가까운 구두 수선가게를 들러서 구두를 손봐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은 아직 나에게 미래가 있다는 암시를 나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망사옷을 입고 경쾌하게 병원으로 들어 가는 세련된 젊은 아낙과 방금 번들 거리는 검은 자가용에서 내린 내 나이 또래의 무표정한 중년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어슬픈 미소가 입가에 슬핏 스쳤다.

 ' 그래. 당신들도 겉보기엔 건강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속은 나처럼 시커멓게 썩어서 칼을 대야 할지도 모른다구'

 스스로 내린 진단에 약간의 위안을 받는 이 고약한 심뽀가 흔들리는 마음의 축을 고정 시켜 주는 조임새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만 썩은게 아니라구..다들 썩고 곪아서 다 들어내고 다 파 헤쳐야 된다구.'

 그러면 나만 억울하고, 나만 속상하고 , 나만 아파 할일은 아니라는, 억지로 긍정적이고도 합리적인 쪽으로 생각을 몰고 갔다.

 나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태만이 불러온 이 결과에 대해서 발등 찍도록 후회를 했다.

잘못된 상식을 고정시켜놓고 내 병을 대입 시킨 어리석음이 낳은 부작용 치고는 너무 혹독하다.

 더 솔직하게 얘기 하자면 산부인과 진료는 여자들이 선뜻 다가가서 진료 받기엔 뭔가 불편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특성 때문에 알면서도 병을 키워오는 경우가 많다고 의사는 걱정을 한다.

정기적인 진료만 받았던들 오늘같은 불상사는 충분히 막을수 있었다는 결론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궁근종'이라는게 맹장염 보다도 더 흔하게 우리 여성들에게 자리 잡은 질병인 만큼 무관심하고 소홀하게 넘어가는 맹점이 있다보니 배안에 혹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우리 여성들 대부분이 이 근종을 가지고 있는데 커지는 위험성 있는건 나처럼 잘라내야 하지만 자라지도 않고 안전한 부위에 생긴건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체크해서 혹의 위치나 사이즈에 관심을 두는건 아주 중요하다고 그 의사는 강조 했다.

 흔히들 자궁을 들어낸다고 했을때 상실감과 우울증으로 인해서 이중고를 겪는 잘못된 상식을 꼬집기도 했다.

 자궁의 역활은 임신과 생리 두가지 뿐이었고, 더중요한 여자로서의 생활은 양쪽 나팔관이라고 했다.

 자궁을 적출 하고 나면 자궁에 의한 질병은 잊을수 있을뿐 아니라 놔 두었을때는 여성질환의 온상이 될수 있기에 가임(可姙)여성이 아니거나 나이든 여성들에겐 이 수술 방법을 권하고 있는 추세였다

 수술 방법도 예전처럼 배를 절개 하는게 아니고 복강경수술 정도로 간단하고 회복이 빠를 뿐 아니라 수술후의 후유증도 없고 비용도 싸다.

 자궁 근종의 대표적인 증세는 갑자기 생리혈량이 많다거나 아랫배가 아플땐 거의 이 근종을 의심해야 한다고 한다.

나같은 경우에는 생리량이 많은게 폐경기가 가까워져서 그리 된줄 알았던 무지가 병을 키웠던 것이다.

나름대로 병원가기가 무서워서 안일하게 진단 내린 내 편의위주의 위험 천만한 발상이었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집에 오니 눈앞에 보이는 게 모두 눈에 거슬렸다.
일주일 이상 아니 어쩌면 더 긴 시간을 떠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두고 가야 할 살림살이를 손 볼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남편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은 곳에 내 손길이 필요했다
 메모를 해서 냉장고위에 자석이 붙은 치킨집 광고지를 덧 붙혀 놓았다.


 * 베란다의 화초는 매일 물을 줄 것, 단 蘭은 내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주지 말 것 - 蘭이 물 많이 먹으면 배 터져 죽음
 * 청소기는 하루 한번 돌리고 걸레질은 이틀에 한번 할 것
 * 빨래는 욕실에 던져두지 말고 바로 세탁기에 넣을 것 - 욕실은 습도가 높아서 곰팡이가 필 확률이 높음
 * 반찬은 냉장고 맨 아래쪽에 있는 것을 먹을 것
 *설거지는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할 것 - 집안에 지저분한 음식 냄새 배이면 기분 안 좋음
 * 기타 문의 사항은 010 - **** -****로 할 것
  ' ~~것, ~ 것'. 남편에게 최대한의 애교를 떨어 보았다.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라도 전환 시켜놓고 가야 남편이 한번쯤은 씨익 웃을 것 같았다.
오후 내내 동동 걸음 치며 집안을 정리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할려고 이렇게 분주를 떤다고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었다.
내가 다시 돌아와 이 자리에서 이 살림을 만지는 날 난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내가 될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