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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일까?


BY hayoon1021 2005-05-27

그 날은 유난히 더웠다. 7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난 남편과 며칠째 냉전 중이었다. 곧 다가올 퇴근 시간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오늘은 늦게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를 꼬드겨야 했다.

가장 마음이 맞는 Y언니는 직장 바로 앞에 집이 있어 칼퇴근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처음 내 제의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난 두 번 세 번 유혹했다.

[언니, 우리도 가끔은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직장 다닐 힘을 얻을 거 아냐?]

[나도 그러고 싶지만 스트레스 풀려다가 더 피곤한 꼴 당하기 싫어서 그런다...]

[그럼 언니 한 시간 일찍 퇴근해서 딱 한 시간만 마시는 거야, 어때?]

난 그 날 술을 안 마시면 마치 죽을 사람처럼 용을 썼다. 결국 언니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한 시간 일찍 매장 문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아줌마답게 장도 봤다. 언니는 딸한테 줄 봉제필통과 간식거리를 샀고 나도 몇 가지 반찬거리를 샀다.

장보따리를 들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바로 코앞 호프집이었다.

치킨 한 마리를 앞에 놓고 오백 한 잔씩을 들이키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언니한테 남편과 다툰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니 어느 새 술도 시간도 정해진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술기운 덕에 기분이 약간 풀어진 우리는 본격적인 넋두리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언니 우리 한 잔씩만 더 할까?]

난 다시 언니를 유혹했다.

언니도 어느 틈에 용기가 생겼는지 별 기대없이 던진 내 말에 그럴까? 하고 반응했다. 

일단 남편한테 전화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휴대폰을 들었다.

[여기 같이 일하는 동생한테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조금만 옆에 있어줘야겠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언니는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언니는 벌레씹은 표정으로 휴대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앞뒤 말도 듣지 않고 욕을 하면서 당장 들어오라고 했다는 거다.

난 언니 남편도 내 남편같은 줄만 알고 그런 응석을 부리라고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언니 얼른 들어가. 아저씨가 화가 많이 났나보네?]

 언니는 잠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었다. 침통한 얼굴이었다.

[안 들어갈 거야.]

결심한 듯 언니는 큰 소리로 맥주를 더 시켰다.

그 날 언니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평소 짐작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고 충격적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됐는데 남편은 한 직장에서 석 달을 넘긴 적이 없다는 것, 항상 외가의 돈을 끌어다 사업을 핑계삼아 허송세월만 보낸다는 것, 실질적인 생활은 언니가 번 돈으로 거의 해나간다는 것, 거기다 의처증 증세까지 있어 언니가 점심만 먹으러 안 와도 뭔가를 의심하며 밤새 괴롭힌다는 것 등 한두 가지 문제가 아니었다.

언니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 쯤은 문제 축에도 끼워주지 않았다.그 와중에도 시어머니까지 모시며 살아왔는데, 다 두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그랬다.

요즘 부쩍 더 괴롭히는 남편 땜에 힘들어하고 있었고, 디데이를 언제로 잡을까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기회가 와서 잘 됐다고 했다.

[언니 그렇지만 이건 좀 그렇다. 퇴근길에 갑자기 사라지는 건 좀...]

난 마치 언니의 그 결심에 불을 붙인 게 내 책임인 것처럼 -내 책임이다-당황하며 언니를 설득했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생각하라고.

하지만 끝내 언니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면 맞아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은 우리집에서 잤다. 다음날 언니는 친정으로 간다며 내 양말을 갈아신고 집을 나섰다. 딸 주려고 산 봉제필통만 챙겨들고서.

그 뒤 친정오빠를 앞세워 언니는 딱 한 번 남편과 대면했고, 남자가 생겨서 집을 나갔다고 길길이 날뛰는 남편과의 대화를 포기한 채, 빈 몸으로 집을 나왔다. 그 남편이 대출 원리금을 내지 못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사귀는 여자가 있는 지방으로 아이들과 이삿짐을 꾸려  떠난 건 언니가 집을 나온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모든 일이 터져 버렸다.

그로부터 2년이 다돼 간다.

언니는 가끔 아이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울적한 심정으로 내게 전화한다. 하지만 그 외의 모습은 다 보기 좋다. 더 이상 생활고와 한숨에 찌든 언니의 모습은 없다.

생기있고 더 젊어졌다.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최고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 날 한 잔 하자고 언니를 부추기지 않았다면 언니의 결혼 생활은 아직도 유효하지 않았을까 하고.

결혼하고 석 달이 지나면서부터 이혼을 결심했다는 언니지만, 어쨌건 10년을 끌어왔는데 더 지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언니는 언제가 돼도 끝날 관계였다고 내 짐을 덜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을 지울 순 없다.

언니는 앞으로 무조건 행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