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살아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들과 제각각 흩어져 살다가
초등학교 때 왕십리에서 다 같이 살 수 있었는데, 가난은 우리를 사글세방을 벗어나질
못하게 했다. 그것도 온돌방이 아닌 연탄난로로 냉기만 겨우 면한 방 한 칸에서
네 식구는 큰 병없이 잘도 살았다. 한겨울엔 견딜 수 없이 추워서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밥을 먹어야했고, 얼굴을 내 놓고는 볼이 시려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야했다. 그래서 큰 동생은 윗풍이 없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불을 뒤집어 써야 잠이
온다고 했고, 나는 손발이 항상 얼음 주머니 같아서 자랄 때 냉방에서 오래도록 살아서
그런거라며 엄마는 지금껏 마음 아파 하신다.
처음 내 집을 장만했던 시기는 결혼을 한지 8년 만이었다. 대대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아파트 분양 받을 기회가 나에게까지 돌아 올 수 있었다. 물론 부잣집인
시집에서 사 준거였다. 아프트를 분양 받아 놓고 입주할 날을 기다리는 그 기분은
매일매일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일기장 뒷부분에 가구배치 및 집 가꾸기 설계도를 그렸다. 거실에 쇼파를 내려놓고
액자를 달았다. 베란다엔 꽃이 만발한 화단을 만들고 안방 창문엔 야실야실 흔들리는
커텐도 달았다. 쉬는 날이면 일산으로 달려가 외벽도 칠하지 않아 누더기 옷 걸친
것 같은 아파트를 손가락으로 한층한층 세어 올라가서는 11층 우리 집을 확인하고
일산주변을 새처럼 휘휘 돌아다니곤 했었다. 결혼해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남편이 제일 열심히 살던 시절이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 내 집으로 들어가던 날은 엄마도 나도 같이 눈물이 나왔었다. 참 넓기도
했었다. 보통평수의 아파트였지만 나와 우리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참 넓은 집이었다.
거실에 걸레질을 하면서 넓기도 하다, 베란다에 물청소를 하면서 길기도 하다, 창문을
닦으면서 교실 창문 같네 했었다. 베란다엔 일기장에 그렸던 것처럼 꽃을 길렀고
거실엔 초록색 레자 쇼파도 놓았고, 안방에 연보라색 레이스 커텐도 달았다. 그리고
9년만에 집은 빚으로 넘어갔다. 엄마도 나도 같이 울었었다. 사람이란 감정은 정말 기뻐도
너무 슬퍼도 눈물을 흘린다. 색깔이 같고 성분이 같은 눈물. 그러나 그 뜻과 기분은 전혀
상반된 표현. 집을 팔던 그 해 여름은 베란다 창에 흘려 내리는 비가 눈물을 닮았었다.
"엄마네 집으로 얘들 데리고 들어와라. 개는 데리고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좁은 집에
개까지 데리고 오면 정신사납다." 엄마가 우릴 받아 주기로 하셨다. 난 개도 데리고 가고
싶었다. 식구였으니까. 그러나 엄마네로 들어가는 것도 미안하고 죄스러운데 엄마가
원하지 않는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아이들을 불러 놓고 얘기를 해야만 했다.
집이 없어져도 울지 않던 아이들이 창가에 흐르는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개도 눈치를 챘는지 슬픈 눈동자로 딸아이 품에 안겨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엄마? 아빠랑 헤어지는 거 이해할 수 있어, 집이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러나
멀건이는 안돼 절대 안돼."
난 엄마한테 부탁을 했다. 내 엄마니까 딸인 나의 부탁을 들어 주실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 품에 안겨서 멀건이도 엄마네로 이사를 했다. 지금 멀건이는 없다.
현관문이 열려 있을 때 배설을 하러 내려갔는데, 멀건인 하루 종일 대소변을
참다가 밖에 나가야만 해결을 했다. 누가 데리고 간걸로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멀건이 얘기를 하면서 마음 아파한다. 멀건인 늙어서 죽었을 것 같다.
잊어버렸을 때 사람 나이로 치면 칠십 먹은 노인네였으니까.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던 일산 신도시 아파트엔 길목마다 라일락이 한웅큼씩 피어
한바구니씩 냄새를 풍겼다. 라일락이 피기 전에 살구꽃이 맨 먼저 피는데, 살구꽃이 질 때는
카퍼레이드 할 때 뿌려주던 환영 색종이 같았다. 그러는 가운데 복사꽃이 진분홍
볼연지로 날 유혹하기도 했었다. 라일락꽃이 한창이면 나무들은 팔마다 초록보자기를
쓰고 봄바람에 못 이기는 척 춤을 추던 그 집, 그 뜰의 꽃나무들...
꽃나무들이 많던 집을 팔고, 두 번째로 내 집을 장만하게 된 아파트 뜰도 넓기는 한데
꽃나무가 없었다. 들어오는 입구에 라일락 한 그루와 외국에서 들여온 외철쭉만이 화려함
이 지나쳐 촌스러웠다. 집으로 들어오는 계단아래 참나물 밭이 있었나보다. 난 무슨 잡초
인가 했는데 이사하던 날 저녁에 엄마가 참나물을 몰래 뜯어와 양념된장과 함께 밥상을
차리셨다. 먹음직스럽게 푸릇했다.
“누가 참나물을 심었을까? 먹어봐라 강원도 고향에서 먹던 그 맛이야. 졸졸졸 흐르던 산
물가에 참나물이 가득했었는데...“ 나는 몽환적인 사상이 남아 있어서 꽃나무만 쳐다보았
는데 엄마는 자식 먹을 걸 챙기느라 경비아저씨 몰래 참나물을 뜯어 왔다고 하셨다.
이런 내가 집을 샀으니, 내가 집을 산 것이 아니고, 행운이 나를 따라 온 것이었다.
뜯을 시기를 놓쳐서 질겨진 참나물로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는데,
이사오던 나를 쳐다보던 라일락이 칙칙한 밤길을 안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