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렇게 단편이 될지
장편이 될지 어머니의 기막힌 일생을 하소연 하듯이
쓸수만 있다면 써도고 하신지가 꽤 오래 전인 것 같다
열 아홉살에 학교 선생님을 하면 큰일 난다고 큰 외삼촌이 말려가지고
수재였던 어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육남매의 넷째로 유복한 가정에서 선생님이 되지 못한것을 빼고는
학교에서도 친정 집안에서도 똑똑하기로는 형제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고 하신다
언니와 동생들이 야단들을 때 외 할아버지의 칭찬을 들으며
오빠 둘의 사랑도 듬뿍받으며 살다가
1947년 구남매의 맏이한테로 시집을 오셔가지고 코흘리게
시동생 시누이들의 뒷바라지와 시할머니까지 망녕이 들어 고모들에게
"부엌에 저 가시나 누고" 하셨다고 하더니 그해 여름 밭에 심어 놓은 참외가 팍팍 썩더니
그 해 돌아가시고 첫 기제사 준비 하시던 어머니는 첫 아이인 나를 낳던 날 자정에
내가 태어나고 자정 넘긴 시간에 제사를 모셨다고 하니 6월 11일은 내 생일이고
6월 12일은 증조 할머니 기일이라고 한다
그날 친 할머니는 "방정맞게 가시나를 낳았노"하시면서 구박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임신했던 겨울 집에는 식구들이 많아 김장김치를 다 먹고 없는데
옆집에 김장독 여는 시큼한 향기에 그 김치가 먹고 싶어 환장을 하겠는데
새색시 가 그런 소리 한번 못하고 참으셨다고 한다
지금 일흔이
다 되어가시는 지금에도 그 김치의 향기는 잊혀지지 않는 다고 하신다
지금도 그래서 김치를 각별히 좋아 하신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친 할아버지는 " 며늘아 내 갔다오께 "하시면 순간에
저 만큼 보이는 산 아래로 돌아 가고 계시는 그 축지법이라도 하신 것 같다는
어머니 말씀이다
돌아오실 때면 팔뚝만한 갈치를 많이 가져 오셔 가지고
그 날은 동네가 갈치 찬치를 벌일 정도로 푸짐하고 맛이 좋았다고 하셨다
그런 갈치 맛은 아직도 찾을 수도 없고 잊혀지지 않는 다고 하신다
2년 터울인 남동생이 세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자 그나마 없던 살림이
더욱 기울어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사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하신다
그리고 보다 못한 외삼촌이 아버지를 부산 하야리아 부대에 취직을 시켜 주셨는데
사고를 내고 그만 두시고 다시 시청 공무원으로 직장을 잡아주셨다
그러다가 농촌 지도소에서 퇴직을 할 때까지 계시다가 시청에서 퇴임식을 하는데
가족들이 모두 참석을 하였다 국무총리 상을 수여 받으시고
그 때 당시 아직도 정정 하신데 일을 그만두시니 마을버스를
운행하여 생활을 연명해 나가셨다
어머니는 사 남매를 두셨는데 부부 사이가 젊은 시절부터
좋지 않아 지금도
두 분을 보면 안타깝기그지 없다
한번도 주도적으로 생활을 이끌어 나오지 못한 아버지 덕분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신 탓에 자궁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3기였는데도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신다
어머니는 특유의 천재적인 두뇌로 알뜰한 살림을 꾸리시기를 50년
그리고 늦게 본 막내 딸(36세)과 더불어
큰 딸의 막내와 증손녀를 돌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120평 대지 위에 45평 건물을 막내 딸과 힘을 보태 지으시고 일 억이
넘는 빚을 지금은 막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갚아 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텃 밭을 일구시고
큰 딸의 병수발을 말없이 한달여 해오시고 계신다
처녀 때 선생님을 하셨다면 더 좋은 집안에 가셔셔 우리를 낳지도
못 하셨을 수도 있지만 어머니 늦었지만 이제 부터라도 큰 딸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방황의 세월이 너무나 길고 철드는 것도 너무 늦었지만 그 동안의 불효 막심한
딸 내미 지켜 봐 주신다면 뭔가 제대로 잘 해보겠습니다
68세 어머니 이젠 많이 늙으신어머니
사치도 모르시고 저희 4 남매 길러 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 없이 감내하시고 혼자 속으로만 앓으시고 이제부터라도
마음 편히 사시도록 마음 고쳐 먹을 께요
부디 오래 오래 장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요 우리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