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봄처녀처럼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벚꽃잎들이 춤추며 방황하고 있다.
튼실한 가지에 붙어 그 편안해보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함초롬한 꽃잎과는 달리
가지 끝에 매달려 공중 휘돌기하고 싶은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꽃잎들이 더 눈에 들어
오고 있다.
개화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벌써부터 떨어지려는 조급함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섭섭함을 안겨주고 있는데 가지끝
꽃잎들은 미풍을 벗삼아 결국 떨어져 나가고 만다.
모든 것이 '내탓이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눈물나는 날들이다.
며칠째 혼자있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무섭게 들린 적이 없었는데 하얀 낮이었음에도 유난히 소름끼치게
겁이 났던 것은 마음이 무척이나 유약해졌다는 표시이리라.
분명 집에 아무도 없는데 몇초 간격으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호흡도 멈춘 채 귀기울여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새소리가 들린다.
한숨돌려 놓고 가끔 있을법한 일이기에 주방쪽으로 다가가 가스레인지 후드위
찬장 문을 열어보니 배기관 통속으로 새가 들어왔는지 꼼짝못하고 갖히고 마는 신세가
되어 버렸나보다.
새들도 익숙치 못한 환경 속에 적응을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목숨잃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으니 도시 속으로 날아든 새의 잘못을 탓할 것인지 변해버린 환경 탓으로
돌려야 할 지 알수없는 노릇이다.
몇년 전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적이 있다.
푸른 화초들로 그득한 곳을 숲속인 줄 착각했을까 어느사이 새가 들어와 푸드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려고 발버둥치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안쓰러움, 나중에 힘없이
타일 바닥에 앉아있는 새를 조용히 다가가 손 안에 넣으니 날아갈 생각을 않았다.
기진맥진한 것일까.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등을 쓰다듬었더니 눈만 뻐끔거릴 뿐
손바닥 위에서 꼼짝을 않았다. 창문열어 손을 펼쳐 내어 놓으니 날개짓하며 공중 향해
날아갔다. 다행스럽다는 생각에 날아가는 방향의 끝을 지켜보며 한없이 눈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전에도 몇번 배기관을 통해 짹짹거리다 날아가 버린 새들이 있었기에 요행을 빌어
보았다.
툭툭....
배기통을 손으로 쳐보니 안에서 반응이 들린다.
'어머! 어떡하니'
'왜 이곳에 날아왔니'
'날아가봐, 들어왔던 곳으로'
내가 생각해도 우스울 정도로 혼자 새에게 말을 건낸다.
알아들은 것처럼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조용하다.
활개치고 날아다녀야 할 새 한 마리....
갖힌 새의 아픔이 동병상련으로 다가왔다.
억압된 삶이라 과장하며 말하곤 하였지만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내게 '자유'는
날개짓하며 훨훨 나는 그런 '자유'가 아니였다.
비록 배기통 속에 갖혀 있는 새일지라도 그곳이 편안하고 더이상 날개짓없이 산다고
해도 괜찮다면 날기를 거부하는 새에게 날으라고 보채는 것도 억압이다.
'자유'란 편안함 속에서 추구하는 자신의 영역을 서로 보호해주면서 관망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한나무로 자라는 연리지처럼 붙어서 하나로 자랄
것이 아니라 붙어 있지만 각기 원하는 하늘향해 뻗어 나갈수 있도록 각자의 몫에
충실히 하면서 보듬어 줄 배려와 이해심이 필요한 것이 진정한 부부의 사랑 아닐까.
짧기만 한 인생사에 왜 그리도 많은 오점들을 매기며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봄날이다.
갖힌 새의 발버둥거림이 없어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염려 한 짐 지고 있던 참에 새 한마리까지 거들어 주었으니 걱정은 사서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보다.
이제 흐벅진 살처럼 통통히 물오른 봄꽃들의 향연 속으로 날아간 새 한마리...
다시는 콘크리트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우둔함을 겪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