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재(9:10) - 황장산 - 큰재 - 장암재 - 환선굴 입구(14:30) 2005. 4. 6 꿈자리가 뒤숭숭하였다. 양양, 고성산불로 온 산야가 초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산에 갈 채비를 하고 있으니 영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 꿈속에서 본 친구로 인해 뒤척이면서 깨어난 새벽녘 떨떠름한 뒷맛에 일어나 보온병에 넣어갈 차를 끓이기 위해 주방 쪽으로 다가선다. 느닷없이 꿈속에 등장하여 재혼한다고 말하던 친구 모습이 생생한데다 화상으로 손과 발이 얽어졌기 때문이었다. 실제 화상을 입은 그 친구는 팔과 다리까지 이은 흉터를 안으며 살았고 그리 친하지 않아 연락조차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아이였기에 갑작스런 등장이 산불소식에 내내 마음 조아리고 있던 나의 잠자리에까지 파고들어 심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함께 산행하려는 회원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면서 집을 나섰다. 24시간 영업하는 분식집에 들어가 김밥 두줄을 사면서도 눈치가 보였다. "위험하지 않으세요?" 한마디 던지며 김밥을 싸는 주인의 말이 웬지 '이 와중에 무슨 산행이야'하는 것 같아 내 안의 양심이 오그라드는 듯 하였다. 그 도덕적 양심을 잠시나마 하늘님에게 맡겨놓고 시내버스에 오르니 생각보다 많은 공범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일까 과연? 댓재의 바람은 얇게입은 등산복 차림을 매몰차게 차갑게 만들어 버린다. 오르다 보면 괜찮겠지.. 댓재에서 올라 황장산 큰재로 가는 코스는 두번째이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조릿대와 일출을 담아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나게 했던 산행.. 설악에 이은 환상적인 단풍에 기함을 토해냈던 산행이었다. 4월의 산행은 아직 녹지않은 눈을 밟으며 가파른 오름길로 향한다. 일주일 전에 다녀왔던 산만해도 봄이 찾아와 한껏 그 봄을 즐기다 왔는데 눈과 강풍, 마른 풀잎들의 반란으로 봄이 언제올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이곳 백두대간은 얼굴 디밀고 나올법한 초록의 모습이 눈에 뜨이질 않았다. 바람에 옆으로 누워버린 잡풀은 봄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듯 음지의 눈을 흘겨보며 어서가라 재촉하는 듯 해 보였다. 매번 느끼는 백두대간의 묘미를 새봄 4월, 알싸한 그 맛 그 기분으로 걸어본다.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군중속의 고독함을 즐기면서... 숨쉬며 봄의 기운을 발산하려 하는 대지의 폭신함에 입가에 번지는 작은웃음 하나 흘리지 않는다. 걱정했던 타지역의 산불소식은 또 까맣게 잊어버리고 산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혹시나 이름모를 야생화 한송이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황장산과 큰재까지 넘는데 5km...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강풍이 불어댄다. 강인한 여인들이어서인지 굴하지 않고 끄떡없다. 하장 배추밭을 경유하면서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었다가 다시 눈위에 오르는 길을 반복하므로 자연히 세탁이 되곤 한다. 변덕스러운 아이마냥 떼쓰는 4월... 얄궂게 내치는 강한 바람이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30여호 되는 기네미골의 아름다운 산촌이 멋진 풍경화 한점 만들어 내면서 고랭지 배추밭 사이 어느길로 가야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평원에서 바람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넓디넓은 그곳에 서있는 나무 한그루... 쓸쓸해 보이지만 행복할 것 같은 나무를 보면서 잠시 쉬어 휴식 취하는 곳임을 알게 된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밭농사를 하다 지친 일손들을 거두어주는 나무.... 그 그늘이 없다면 얼마나 힘들까... 감사해야 할 나무라 생각하면서 잠깐 생각했던 쓸쓸함 하나는 건져두며 그 옆을 스친다. 정오를 조금 남겨둔 시각.. 도보 3시간 40분무렵 점심시간을 갖는다. 든든히 아침도 채우고 산행중간 간식도 먹었건만 쉬지않는 행군으로 몹시 허기져 있었다. 눈치보며 사온 김밥 두줄 간단히 해치우고 야생짐승들의 먹잇감으로 나무 밑둥에 조금 남겨놓았다. 양식이 없어 여기저기 갉아먹은 나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은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길목에 그리움 한점 뿌리며 갈림길인 장암재에서 잠시 쉬어간다. 계속 가면 덕항산으로 가는 길이고 우리는 약수터를 거쳐 환선굴로 이어 지는 코스를 택하였다. 이젠 바람을 등지고 내려가는 하산길...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환상의 내림길이었다. 하나 둘 보였던 노루귀의 모습이 군락을 이루며 흰색, 분홍색, 보라색으로 때론 바위 틈에서, 절벽에서, 마른 풀사이 장소를 마다않고 등장한다. 낯선 새순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저 아래에서 벌써 꽃피운 현호색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3년전 속리산 입구에서 처음보고 알았던 현호색... 자연의 옷을 입고 있는 이 꽃을 들여다 보면서 어떻게 조물주는 이런 색을 만들어 주었을까. 산 들머리에서 장암재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과 이 하산길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내려갈수록 노루귀는 지천이었고 생강나무의 노랗게 핀 경치를 보고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댄다. 바람타고 코끝을 스치는 그 향기에 그만 넋을 잃어버린다. 가파른 전망대에서 바라본 산 아래... 이렇게 예쁜 봄이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지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은 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산에게로 다가가 하나가 된다는 것... 얼마나 큰 마음의 평안인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다가가지 않는 자는 절대 느낄수 없는 경이로움인 것이다. 순리에 따르며 피고지는 가냘픈 꽃송이들, 누구를 위함도 아닌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아름다움 앞에 찬사를 보낸다. 험준한 산에 놓여진 철계단과 로프를 이용하여 가다보니 구멍뚫린 동굴이 보였다. 세상에! 어쩜 저럴수가... 하늘가는 천국의 열쇠가 저곳에 있을까... 저곳이 길이라니... 몇년전 시에서 등산로를 재정비 개방했다고 하더니 이렇게 멋진 코스를 만들어 냈을 줄이야... 전에 누군가 환선굴 뒤로 오르는 덕항산이 너무 험해 무척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 힘듬이 싹 없어졌다고 했는데... 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이 길로 오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비록 험한 코스라 할지라도... 구멍뚫린 굴을 통과하니 앞은 절벽이고 옆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저 아래 동양최대의 동굴인 환선굴이 이 산을 힘겹게 이고 있나보다. 짧은 미니스커트 입고 예쁜다리 뽐내듯 자그마한 꽃송이들을 달고 있는 괴불나무 역시 이른 봄에 피는 꽃이였다.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꽃나무가 꽃한송이 들여다 보는 내게 큰 횡재를 안겨준 것 처럼 고혹적이며 매력적이였다. 꽃향기에 취해 어느사이 등산로와 환선굴 입구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산속에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점점 커지면서 줄 이은 학생들의 행렬에 입이 쩍 벌어진다. 주차장에서 환선굴까지의 거리를 이미 알기에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오는 아이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샘터에서 물 한모금 받아 마시는 학생들의 입에서 마시지 않아도 시원함을 대신 느낀다. 많지 않은 우리 일행들의 무사산행도 어느덧 마감하면서 올라오는 학생들의 수가 많을수록 기분좋아짐은 그만큼 애향심에서 비롯된 기쁨 아닐까.. 설악산과 낙산사의 화마 출현으로 각 지역에서 올라온 수학여행단이 주차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중고등학생들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뿌듯함을 한번더 느끼며 내려온 덕항산을 뒤돌아 올려다 본다. 하늘님이 맡아주셨던 우리들의 양심은 보관료없이 무사히 돌려받으며 내 인생의 스케치를 그려준 산에게 감사 또 감사함을 무언으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