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휴일이라 늦은 아침을 먹고서, 친정으로 성묘를 나섰다.
아이들이 이모집에도 들러서 오길 바래서 언니에게 줄 선물을
챙겼다.
가는 도중에 쇠고기단지에 들러서 늦은 점심으로 먹을 고기를 가득사고,
친정부모님이 계실 곳을 향했다.
과연 청명인 관계로 도로의 차량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깨끗이 포장된 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몇 발자욱을 떼어서 산소에 도착을 했다.
항상 형부가 산소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손질이 잘 되어 있다.
그것으로 고마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산소주위에는 할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새손이 돋아나는 걸로 신비스러움과 꼭 부모님이 반겨주시는 매개인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딸내미가 할미꽃을 꺾었다.
신랑이 그것을 보더니
"할미꽃은 뿌리째 뽑아서 심어야지. 그렇게 뜯으면 금방 시든다."
딸내미는 외갓집에 가 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산소엘 자주가는 편이니깐, 엄마의 부모님이란 것은 알고 있다.
별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게 된 것 같다.
신랑은 전 날 과음을 한 관계로
음복은 정말 나 혼자 했다.
막걸리를 세잔인가 마셨다.
어느시인이 그랬던가?
막걸리 맛이 엄마의 젖맛이었다고....
그럴리야 없겠지만 의미를 담아두자는 말로 해석을 한다.
내가 유년을 보냈던 마을을 지나쳐 오게 된다.
흔적없는 집자취에 고개를 돌리게 되는 마을을...
지금은 그 집을 다시 살까? 도 심각하게 고려중이다.
우리집 옆집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거기엔 친구도 한 명이 있다.
서로 결혼을 하고 만난지도 넘 오래되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갔더니, 그 친구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나를 본다고 했다.
그녀의 막내동생은 내가 떠날 때는 코흘리개였었는데,
고맙게도 나를 기억해 주고 있었다.
"누나"
"누나"라고 불러주어 내가 더 어색하게 귀에 들리는 소리였다.
남자 형제가 없는 관계로 자주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도로가에 할머니께서 나를 알아보았다.
"니가 누구 아니가? "
"네, 할머니 저 아시겠어요? "
"그럼 널 알지? 그래 잘 살지? 아들은 어떻게 되고..."
차에 타고 있는 아이들과 신랑을 불러서 인사를 시켰다.
그 할머니.
바로 우리집과 접하고 있었다.
집이 대궐같은 집이었다.
특히 그집은 사랑채에 딸린 화단이 너무 예뻤다.
어린 그 시절에도 그 집에 가서 그것을 몰래 훔쳐 볼 때가 많았다.
지금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내가 어릴때는 살아계셨는데,
아마도 갑오개혁이전 사람이었다.
그 때 내가 계산을 해 본 것으로 19세기 사람이었다.
그 상할머니께 가끔씩 나는 손톱을 깎아 드리러 그집엘 드나들었다.
놀라웁게도 그 상할머니는 그 시절에 한글을 알고 계시어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그리고 가끔씩 엄마의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시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머슴이 사는 집도 따로 나 있는 집이었다.
그 때는 이미 머슴들은 다 떠난 후였지만,
우리집을 접하고 있었던 토담 담장에 채송화가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
그 집에서 심었던지, 아니면 홀씨가 날아들어서 그랬는지,
우리집 뒷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피는 황매화는 숨이 넘어갈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대구시내로 나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면서도,
흩들어지게 피어나던 그 황매화가 피는 계절이면 병을 앓듯이 그렇게 그 꽃이
보고 싶었졌다.
첨에는 꽃이름도 몰랐다가 아는 교수님이 이름을 가르쳐 주셔서 기억을 하고 있다.
삼십 몇해를 휠씬 넘겨
그 옛날 내가 뵌 상할머니 정도의 연세가 된 며느리인 그 할머니께서
"오늘 밖에 잘 나와서 있었구나? 널 다 보고,,,"
가끔씩 울아버지와 언성도 높이 싸우시던 그 할머니가
그렇게도 오래 장수하신다는 것이 왜 그렇게 고마웠는지...
어린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부자인 할머니의 한평생을 보는 것 같아
맘이 기쁘면서도 아련해 왔습니다.
"담에 저 혼자 오면 할머니 뵈러 갈께요... 건강하세요...할머니"
돌아서서 오는 내내 맘이 묵직했다.
언니집에 도착해서 언니에게 말을 했더니,
할머니 연세가 102세라면서
"치매기가 조금 있는데, 어떻게 널 알아보시는구나?"
했다.
항상 성묘를 가면서도 바삐오는 걸음이었는데,
뜻박의 친구와 할머니를 뵙옵고 돌아오는 맘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가슴 벅차 오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혹 라라님 보시게 되오면,
제 멜은 allgolkr@hanmail.net
주소를 보내주시면, 레코드판을 보내드릴께요.
오늘 일찍 퇴근하고 온 신랑에게 레코드판을 처분할 거라고 했더니,
"그게 아직도 있나? 마돈나꺼는 좀 안되는 것 같더라. 난 없앴는 줄 알았구먼."
이제는 문명의 발달로 더 이상 레코드판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매체에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사라져가는 것에는 늘 아련한 표현 할 길 없는 멍한 맘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