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엄마는 가요무대 팬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흘러간 구식노래만 좋아하는 엄마가 이상하게 보였다. 엄마는 늘 노래를 구성지게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슬쩍슬쩍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베개를 베고 모로 누워 가요무대를 보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은 쓸쓸해서 참 싫었는데 이제는 내가 콘서트 7080을 보면서 그러고 있다. 오늘은 특히 사랑의 하모니라는 팀이 나와서 별이여 사랑이여, 야화 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그 중 야화라는 노래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난 하던 일도 멈춘 채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십년 전, 나는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홀로 상경해 척박한 화실생활에 뛰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내 꿈은 줄기차게 만화가였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비록 내가 원하던 바를 이루지는 못 했지만, 2년 남짓한 화실생활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오직 만화에 대한 꿈만 불사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단행본이 잘 나가던 그때는 화실 규모가 커서 식구들도 많았다. 아르바이트생인 열일곱 고등학생부터 서른이 넘은 사람까지 나이도 다양했고 여기저기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다. 목표가 같고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 우리는 쉽게 하나로 뭉쳤다. 남녀의 구분도 없었다. 일이 바쁘면 함께 밤을 샜고 피곤하면 아무 구석에나 쓰러져 잤으며 누가 라면이라도 끓여 놓으면 우르르 달려들어 머리 맞대고 먹었다. 나처럼 자취방을 얻은 사람과 그 방에 신세 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화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자면 마찰이 많을 것 같지만 우리는 큰 충돌 없이 잘들 지냈다. 그건 아마도 만화 그리는 사람들이 다 순수하고 욕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실생활은 대체로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는 식이었는데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술 마실 때 우리가 즐겨 찾는 안주는 으레 쟁쟁한 유명작가들이었다. 그들을 마음껏 난도질할 때면 잠시나마 초라한 문하생 신분을 잊을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원고가 완결되면 선생님은 크게 한턱을 냈다. 그 날만큼은 우리가 술값에 구애받지 않고 실컷 마실 수 있었다.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 다음 마지막으로 가는 장소는 항상 노래방이었다. 나는 그를 노래방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화실생활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노래방에서야 겨우 그의 존재를 알아봤을 정도로 그는 눈에 안 띄는 사람이었다. 물론 노래방에서도 그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 갔을 것이다.
파장 무렵의 노래방 분위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술에 취해 떠들 사람은 떠들고 소파에 처박혀 잘 사람은 자고 울고 싶은 사람은 울고 춤출 사람은 춤추고 한번 마이크를 거머쥔 사람은 지쳐 떨어질 때까지 노래를 불러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광경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넋을 잃고 구경했다.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야화라는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온 것은. 시끌벅적한 트로트와 댄스음악이 판을 치다가 그 곡이 나오자 장내는 그야말로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는 분위기 깨서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 나왔다. 차분하고 촉촉하고 에로틱하기까지 한 음색이었다. 나는 등에 얼음 조각을 집어넣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율이라는 것이, 심금을 울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대책 없는 짝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는 항상 우울한 얼굴에 왜소한 체구로 구부정하게 걸었다. 화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진 않았지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는 늘 자기가 그리는 그림처럼 조용히 구석자리에 박혀 있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카세트라디오가 있어서 화실의 DJ 역할을 하기도 했다. 멀리서 들으면 좋지만 바로 옆에서 듣는 그로선 괴로웠을 텐데도 싫다는 표정 하나 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 주었다. 난 그가 선곡하는 노래는 무조건 다 좋았다.
그렇게 일 년 이상을 나는 혼자 애태웠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가 좋았고 무엇보다 그의 노래가 좋았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떤 것이든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야화 말고도 들국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특히 사랑이 끝난 후 같은 노래는 압권이었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팠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우리는 동갑이었는데 그는 친구로 잘 지내자고 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를 대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얼마 후 화실이 해체되면서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그들 중에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만화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불경기 탓에 전업한 사람도 있다. 나 역시 만화 그리는 남편과 결혼했지만 먹고살기 힘들어 만화를 접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로선 뒤늦게나마 화실생활을 해본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소원성취는 한 셈이니 크게 미련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은 그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 바람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토록 시린 몸짓을 보이더니 이리 빨리 가버리려고 그랬던가. 그가 남긴 노래 야화만이 계속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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