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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친여자 (쉰움산행기)


BY 동해바다 2005-03-09

 

    05. 3. 9  오전 9시출발 - 정상 11시40분 - 2시하산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 - 쉰움산 정상 - 천은사


    미친여자 (美親여자) 
    어떤 대상과의 친밀도가 더해가면서 그야말로 빠지고 미쳐버리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미친(美親)에 대한 해석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 줄 모른다고 뒤늦게 산맛을 알고 난 나는 미친여자가 
    되고 있었다. 산이 그립고 늘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여자, 나는 이미 미친여자였다.

    산간지방은 근 1미터 넘게 눈으로 뒤덮였고 시내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이내려 
    눈과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먼 산을 바라보면서 그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생각에 눈오기 시작한 날부터 
    가까운 산을 그야말로 미친여자 소리 들어가며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산속을 
    누비며 다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9일 오지산행으로 약속이 되 있었던 터라 자못 기대가 컸다. 
    하지만 턱없이 차 오르는 눈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꿩대신 닭이라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쉰움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683m밖에 되지 않는 산이기는 하지만 두타산 청옥산과 연결되어 시민들과 산을 
    오르는 애호가들에게 많은 발길을 불러들이기로 유명한 산이다. 
    1미터 넘게 눈이 내려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산행... 
    아무리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망설여지게 되는 산행이지만 우리 산악회의 
    대장과 몇몇이 의기투합하여 오지산행 대신 쉰움산을 오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마침 눈온 뒤 기온이 급상승하여 많이 녹았으리라 예상하면서... 

    버스는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종점에 우리를 토해놓고 마을주민 서너명을 다시 
    집어 삼키곤 오던 길로 되돌아간다. 
    천은사로 오르는 아스팔트 길이 눈녹아 흐르면서 음지는 얼음길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절 입구 보수공사 자재를 보관하던 곳이 지붕이 내려앉아 마치 배의 모양을 흉내내고 
    있다. 철거할 때를 맞추어 부서져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할까 .. 

    감로수 한모금씩 목을 적시어 주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단단히 준비하고는 산에 
    오른다. 산에 미친 사람이 또 한명 있었는지 희미한 발자국 하나가 그나마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9명중 두번째로 섰다. 
    한명이 러쎌을 하며 길을 찾는다. 그래도 많이 녹아 눈높이는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한발한발 들어야 하는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체중의 차이에서 오는 발의 깊이가 회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든다. 

    눈밑에서는 한창 올라오고 있을 봄의 뿌리들... 
    지금쯤 얼마나 바쁠까. 
    새 생명을 잉태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한 준비운동에 땅 위 하얗게 뒤덮여 
    있는 눈은 야무지게 눌러대고 있지만 그 위세는 따뜻한 기운앞에서는 맥을 못추고 
    있었다. 

    춘삼월의 폭설... 
    한켠 양지에서 눈물 쏟아부으며 굴복하고 있는 겨울 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졸졸졸졸.... 
    물줄기가 많이 약해지면서 늘 목마름에 젖어있던 쉰움산... 
    10년전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때만 해도 콸콸 흐르는 계곡물이 점점 줄어 그나마 
    약한 물줄기를 절에서 끌어들여서인지 그 아래 계곡에서는 전혀 물을 볼 수가 없었다. 
    헌데 폭설이 큰비 못지않은 역할을 했음일까... 
    오랜만에 쉰움산에서 듣는 물소리가 제법 산의 형태를 갖추는 듯 하여 가슴이 
    뿌듯하였다. 

    

    기온은 따뜻하고 여기저기 봄이 오는 소리들이 들리는 듯 하다. 
    눈(目)에서 눈물(漏)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눈(雪)에서 눈물(水)이 흐른다. 
    '봄눈 녹듯 녹아든다'라는 말이 있다. 
    힘없는 눈은 봄날 찾아들어 야무지게 퍼붓긴 했지만 이렇게 힘없이 녹아들고 
    있었다. 눈녹고 초록군단이 몰려오는 날이면 야생화잔치가 또 벌어질 것이고 
    난 또 그 꽃들에게 미칠 것이다. 

    숨고르기 위해 하늘한번 쳐다보고 뒤도 한번 쳐다본다. 
    나무없는 동네어귀 얕은 산자락에 하얀 눈이 뒤덮여 아름다운 설경하나를 또 하나 
    만들어주고 있었다. 

    

    살빛 좋은 속살을 내어주며 꺾여있던 소나무 가지들이 여기저기 시체처럼 누워있다. 
    눈의 무게에 못이겨 껶이긴 했지만 우후죽순 자라나는 잔나무 가지치기를 겸사겸사 
    해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곤 하였다. 
    생각하기 나름이라....안쓰럽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정상까지 한시간이면 오를 산을 두시간 반 정도 걸려 올랐다. 
    그만큼 체력이나 시간이 곱절로 드는 산행이지만 즐거움 역시 배가 되기도 하였다. 
    웅덩이 오십개가 된다는 쉰움정에 자릴 피려 하니 바람이 너무세게 불어댄다. 
    조금 아래 내려가 눈밭을 다지고 밥상하나 큼지막하게 차려놓으니 배에서 꾸르륵 
    신호음을 보내준다. 

    

    

    점심을 라면으로 대신하고 내어놓은 과일과 과실주, 떡으로 포식을 하고 나니 
    누워 한잠 잤으면 할 정도로 노곤하다. 

    발만 헛딛으면 옆으로 떨어질 것 같은 하산길..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폭신한 눈길에서는 뛰어가다 반복하니 어느새 눈깜짝할 
    사이 내려왔다. 
    러쎌하여 올라간 산길에 열명의 발자국은 내려올때 너무쉽게 하산할 수 있는 
    큰 길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40분 만에 천은사에 다다른다. 

    

    산중에서도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는 생강나무의 봉오리가 열릴듯 말듯 눈 위에서도 
    터트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비록 흰 눈속이지만 봄의 소리가 너무나 청아하게 
    들려와 곧 노오랗게 그 모습을 나타낼 것만 같았다. 
    발길따라 함께 내려온 맑은 물을 한모금 또한 마시니 땀으로 젖어있는 온 몸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다. 

    천은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흡사 비가 내리는 듯 주루룩 쏟아져 내리고 있다. 
    
    눈쌓인 산행을 몇번 더 할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가 우리를 
    설레이게 한다. 봄이면 눈을 더욱 더 보내주는 이곳 영동지방의 폭설이 요 며칠동안 
    나를 미친여자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저 뒤에서 두타산이, 쉰움산이, 천은사가 우리 미친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