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있다. 중2,. 그러니까 열 다섯에 만나 지금까지 계속 연락이 되고 있는 친구이다.
아니, 연락이 되고 있었던 친구이다.
때로는 사나흘에 한 번, 때로는 수개월만에 한 번 그렇게 드문드문 연락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연결고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오늘 정말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의 1년 정도 지난 것 같다.
사실 우리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늘 그 친구가 주장하듯 정말 오로지 그 친구의 노력 덕분이었다.
나는 시부모님 모시고 산다는 것을 엄청난 특권쯤으로 여기는 것 마냥 나의 무심함이 그 변명으로 다 덮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왔다.
"가시나... 맨 날 이 언니가 전화해야 연락이 되나, 니가 먼저 하면 좀 어떻노. 내가 연락 끊어버리면 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날끼다.. 우예 그리 무심하노."
그 친구는 늘 그렇게 볼 멘 목소리로 내게 투덜거렸다.
그러면 나는 픽하고 웃으면서
"그래, 고맙다. 다 니 덕분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연락해 주라. 어느 날 갑자기 이 전화 번호는 결번이오니... 이런 메시지 안 듣게.... 알았지?"
정말 그 친구에게 늘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갖고 지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친구는 내게 계속 연락해 오리란 믿음을 무슨 배짱처럼 든든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그 친구를 아주 가끔은 조금씩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아침에 어머님께 한 말씀 듣고 우울해 있거나 만사가 짜증나고 속상한 마음일 때 그 친구의 전화가 걸려 올 때가 종종 있었다.
한참 청소를 하거나 집안 일로 바쁠 때도 그 친구의 전화는 가리지 않고 걸려왔다.
내가 그 친구의 전화를 마냥 반가워만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곁에 어머님이 계시고 속은 타고 그럴 때에도 친구가 좀처럼 전화를 먼저 끊는 일이 없어 오래도록 전화를 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다보니 분위기도 좋고 해서 나랑 오래도록 수다나 떨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딸아이 학교 숙제로 삼행시를 지어야 하는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내 신세가 한탄스러운 심정일 때, 나와는 너무나 다른... 자유로운 생활의 여유가 뚝뚝 묻어나는 그 친구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어머님이 곁에 안 계시면 이런저런 하소연이라도 했겠지만 그럴 처지도 안 되는 그런 때... 나는 긴 한숨만 포옥 하고 내 쉬었다.
그러면 친구는 내 기운 없음을 느끼고 "왜, 옆에 시엄니 계시냐?" 라고 묻는다.
"그래, 눈치 빠른 친구네..." 라고 응수하면
"어휴, 넌 왜 그렇게 사노? 정말 니가 그렇게 살 줄은 몰랐는데..."
"왜? 어떻게 살 줄 알았는데?"
"맨 날 잘난 척 해서 멋들어지게 살 줄 알았다."
그래, 그 친구 앞에서 난 늘 잘 난 척 했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맨 날 내 옆에 와서 남자 이야기나 하고 그랬다.
나도 공부를 열심히 안 했지만 그래도 그 친구보다는 아주 쪼끔은 더 열심히 했고 쪼끔은 인생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산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래서 친구로서 충고해 준답시며 이런저런 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때로는 그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대신 연애편지를 써 주기도 했었다.
아주 찐하게 적은 편지 내용 때문에 오히려 악영향만 끼쳤지만....
친구는 저보다 잘 나지도 못하면서 잘 난 줄 아는 한심한 친구인 나를 언제나 좋아해 주었다. 덕분에 중 2때부터 여고 2학년까지 우린 거의 단짝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가끔 그 시절 주고받은 쪽지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니는 와 다른 애랑 같이 다니노? 난 그게 싫다.>
<오늘 우리 영감한테(영감은 제 아버지를 두고 부르는 호칭: 버릇없다고 내게 면박 받음) 니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마라.>
그 친구 아버지는 내가 키도 크고 순해 보여서 믿음이 간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신 분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 핑계 대고 남자친구 만나러 다녔다.
맨 날 싸우고 화해하고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 들었던 친구.
친구는 결혼해서 정말 야무지게 잘 산다.
나보다 훨씬 똑 소리나게 제 주장 해 가면서 재미나게 욕심껏 살아간다.
나는 늘 집구석에 틀어박혀 정말 답답하게 살고 있다.
내 주장... 그런 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냥 그냥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냥그냥 사는 것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내가 작아지는 삶.
내가 연락하지 않아도 그 친구는 절대로 연락 끊지 않고 내게 연락처를 남길 친구라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오늘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하도 걸려오지 않는 전화 때문에 문득문득 궁금하고 그리워서...
그런데...<이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그러고 보니 달리 이 친구랑 연락할 길이 없다.
내가 서울로 전학 오고 결혼하고 한 뒤에도 언제나 내 연락처를 알음알음해서 알아낸 것이 바로 그 친구였으니까...
웃으면서도 때론 날 원망스럽게 생각지 않았을까?
늘 앉아서 전화만 받고 고리타분한 소리만 하는 내가 속상하지 않았을까?
때론 귀찮아하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하는 내게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늘 걸쭉한 음성으로 웃어버리던 친구.
오늘 아침엔 커피라도 마시며 쓸 데 없는 수다라고 한 바탕 떨 수 있었는데...
삼행시 아니라 오행시라도 깔깔대며 지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야 난 네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