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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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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가지


BY 김정인 2005-03-07

남편과 나는 싸움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마음이 아파서 길게 말다툼을 못한다.

비록 의견이 틀려 토닥거리다가도 감정이 격해지면 나가버린다든지, 속으로만 씩씩거릴 뿐. 사실 주말 부부를 할 때는 한번 싸우면 일주일을 가므로 싸울 기회도 몇 번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줄곧 타협을 보지 못하고 싸우는 문제가 하나 있다.
어제도 그 문제때문에 시어머니께서 오셨는데도 물구하고 작은 방에서 둘이서 토닥거렸다.

 

시어머니께서 오셔서 기차역으로 마중을 갔던 남편의 차가 어제도 김을 풀풀내면서 자신의 노쇠함을 과시했었나보다.

요즈음 들어서 자주 수리공장에 들락날락했던 터라 더더욱 화가 머리 끝까지 났었나보다. 하기사 10년동안 부려 먹었으면 퍼질만도 하지만, 우리 경제 형편으로 보아서는 조금 더 견뎌 주어야 하는데.

어제는 앞, 뒤 상황 설명도 없이 남편이 먼저 조금은 강도높게 다짜고짜 시작했다.

" 봐라, 나 불안해 죽겠다. 차 사자카이. 자꾸 버티다가 무슨 일 날랐꼬.기차역에서 집까지 겨우 왔다. 수리 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이게 뭐꼬. 고치는 돈이 더 들겠다."

"그래도 우리 형편에 매달 2-30만원씩 낼 할부금이 어디 있노. 지금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얼만데."

"그런 언제 살 수 있는 지 말해 봐라"

"한 2-3년 후쯤"

"나는 그래 생각 안한다. 2-3년 후에 좋아질 거라고 안 본다. 이왕 이래 살 거 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싶다."

"왜 차근차근 갚아 나가면 좋아지지. 그리고 우리 형편에 2000cc가 뭐꼬. 돈을 우예 감당할라고. 꼭 2000cc를 타고 싶은 이유가 뭔데?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 봐라. 내가 알아듣게"

"나이도 나이고, 편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운전하고, 사람들에게 후퇴하는 모습 보이기 싫고."

기가 찬다. 남의 눈이 뭐랐고. 1500cc타다가 1300cc타면 어떻노. 겉면만 내는 20대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남편이 6살 아들과 같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아가. 그런 생각을 하구로. 남 생각하다가 우린 굶어죽겠다. 우선순위가 있어야지. 빚 갚고 차 사자고 하는 거 아이가. 나는 빚에 깔려서 죽을 지경이다.

당신이 돈 많이 벌어오면 내가 뭐 이런 걱정 할 필요도 없다. 아들은 자꾸 커가 돈 들어갈 곳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야' 라고 막 퍼붓고 싶었지만, 그러면 대화 자체가 엉망이 될 것 같아, 심호흡을 깊게 하고 조분조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보고 돈 많이 벌어오라고 바가지 긁은 적 없잖아. 난 그냥 우리가 가진 것 만큼만 하고 살았으면 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당신이 지금 벌어오는 것 불만없고 빚만 다 갚으면 우리도 괜찮지 싶다. 그 때까지만 고쳐 타든지, 작은 차 타면 안 될까? 형편으로는 자전거 탈 형편이지만 말이야."

남편은 한참을 투정을 부리는 아이마냥 퉁 해 있더니 힘들게 속내를 드러내었다.

"난 당신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자존심 상한다. 차라리 돈 많이 벌어오라고 윽박지르는 게 낫지."

이 한마디로 모든 게임은 끝나버렸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내내 중소기업에서 일해 온 남편을 어려울 때마다 신혼초부터 위로한답시고 한 말이었는데, 자존심이 상했었다니 할말이 없다.

자기를 그 정도의 돈 밖에 못 벌어오는 남자로 단정지어 버리는 나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었나보다.

 

돈=능력, 차크기=능력, 힘세기=능력이라는 공식은 원시시대에나 통하는 말이지, 정말 남자들의 마음은 여자인 내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참 많다.
불쑥불쑥 중요한 순간마다 들먹이는 남자들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더더욱.

예민하고 자유로운 우리 남편이 이렇게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낚시하며 혼자 다 정리해 기분좋게 얘기하건만, 얘기하는 중간에 마음이 들켜 우울해 하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다.

속을 버선목 까발리듯이 확 뒤집으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아물지 않은 생채기처럼 마음 한 켠이 하루종일 쓰라리기만 하다.